나의 뜰/이야기

오대산 계곡을 걸으며

김낙향 2008. 10. 13. 12:39

 

상원사 주차장에서 월정사까지는 너무 먼 길이나 가는 데까지 갈양으로 괴나리봇짐 단단히 묶듯 배낭 줄을 당겨 메었다.

카메라는 목에 걸쳤다. 누가 보면 사진 마니아 같은 그럴듯한 모양새로.

초록과 붉은색이 어우러진 나뭇잎 위에 햇살이 반짝인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들고나는 사람이 없는 숲길을 걷노라니 음영의 실루엣이 아침 햇살만큼이나 돋보이고

초록 잎들 깨끗한 햇살 두어 발 몸에 감고 단풍 들기를 거부하듯 깊숙한 그늘의 문창을 두드린다.

이미 떨어져 슬픔이 한껏 고였다가 빠져나가 뒤틀린 나뭇잎, 참하게 살았어도 마지막 가는 길은 자연이나 인간이나 다를 바 없음을 보여 준다.

 

시간이 어지간히 지났나 보다.

꾸역꾸역 들어오는 관광버스를 피해 계곡 안으로 걷는다. 바위와 돌이 많아 생각보다 어려우나 강렬한 단풍빛에 취하여 걷다 보면 뜻하지 않는 장면과 마주친다. 갖가지 단풍잎 예고 없이 와르르 날리는 소리에 귀가 열리고 햇살에 부딪히며 떨어지는 예쁜 풍경에 눈이 즐거워진다.

 

한 젊은이가 산중에서 스님을 만났다.

스님 "수류화개실(水流花開室)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네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다." 답하니 어리둥절하였다 한다.

젊은이가 만났던 분이 법정 스님이었다.

요즘 법정 스님 산문집을 읽고 있는데 산중에서 지내는 이분의 글은 책 제목 그대로 맑고 향기로운 글이 내 안에 다붓하게 쌓인다.

 

어디서 어떤 형태로 살든지 그 안에서 물이 흐르고 꽃이 피도록 해야 한다는 말을 꼭꼭 씹으며

산문집에 있는 옛사람이 읊었다는 글을 옮겨 적어본다.

 

산에서 사는 사람이라

산중 이야기를 즐겨 나눈다.

5월의 솔바람 소리 들려주고 싶지만

그대들 값 모를까 그게 두렵네.

 

산 사람의 마음을 어쩜 요리도 정갈스럽게 표현을 하였는지

 

멀다 보니 걸음이 조금은 나태해지지만, 수류화개실이라는 말을 곱씹으며 오늘도 걸을 수 있다는 기쁨이 맑고 향기롭다.

삶이 피곤하고 지칠 때는 세월이 빨리 가 "인생, 종례 종이 울렸으면" 하던 때를 떠올리며

벌써 10월이니 "내 생애에서 또 한해가 빠져나간다."는 법정 스님 말이 절절히 실감이 나고

한 해 두 해 빠져나가는 세월에 조급증만 는다.

 

 

산중에 든 사람들이 암자에 있는 스님에게 좋은 말씀 듣고 싶다고 청하였는데 법정 스님은 산이나 둘러보고 가라 하면서

아무리 좋은 말이기로 자연에 견줄 수야 있겠는가. 자연만큼 뛰어난 스승은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사람의 말이란 자연에서 한낱 파리나 모깃소리와 같이 시끄러움일 뿐이다."라고 말한 글귀가 가슴에 박힌다.

 

 

몇 구비 돌고 돌아도 월정사는 멀기만 하다. 상원사 주차장에서 월정사까지는 12km이니 30리 길 아닌가.

가는 데까지 갈양으로 느긋하게 쉬어가며 사진 찍고, 햇살에 투영된 나뭇잎 속살도 찍으며

음지가 있어 양지가 돋보이는 것은 사람 사는 곳에도 있으나 자연에서 만나는 것이 더 감동이라는 것을 체험한다.

 

침빗살나무 열매가 앙증스러워

 

 

내 영혼까지 물든 것 같은 단풍에 렌즈를 들이대며

버릴 것은 버리고 포인트만 잡으라 하는 사진가의 말을 항상 염두에 두지만 뜻대로 안 된다.

비움의 철학을 실천하지 못하는 인간의 삶도 이와 같지 않은가.

월정사까지 가지는 못했으나 화사한 가을을 만나 정갈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면서

비울 때 비우고 물러나야 할 때를 놓치지 않는 자연의 슬기로움을 마음에 담아 본다.

작심삼일이 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