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산행 길에서...
보라색 제비꽃이 즐비한 길을 조금 오르자 진달래꽃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진달래나무들의 매끈하고 날씬한 가지 끝마다 제 몫을 다하여 피워낸 은은한 꽃 맵시는 조금도 요란스럽지 않고, 천하게 보이지 않는 수수한 맑음이었습니다. 고려산은 어떠했는지 모르나 혈구산 진달래는 그러하였답니다. 너무나 자유분방하게 휘어져 있는 풍경은 매우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었어요.
카메라 렌즈로 진달래를 훔쳐보고 있노라니 수많은 꽃송이마다 허공이 떠받히고 있는 것 같았어요. 휘어진 나무도 처진 꽃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냥 몸을 기댄 것 같은 자연스러운 모습들이 아주 예뻤답니다.
나태주 시인의 "기쁨"이란 시를 떠올리며 바라보았지요. 마지막 연에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그들 사이에 사람인 내가 모르는 잔잔한 기쁨이 / 강물이 흐른다>
꽃송이마다, 그 송이를 피우는 가지마다 화사한 맑은 색은, 시인의 말처럼 기쁨이 강물처럼 흐르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겨우내 기다렸던 꿈을 봄이 무르익는 4월에서야 맘껏 피우니. 어찌 안 그러겠어요.
여기도 저기도 진달래 숲에 수놓듯이 연한 녹색의 나무순들도 매우 고왔답니다. 아주 신선하였어요. 하늘에는 심술궂은 검은 구름이 진달래꽃 색을 마셨다 뱉었다 하는 입김이 얼마나 새침한지 추워서 떨었는데, 정상 진달래도 입을 꼭 다물고 있어요.
고려산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니 번잡하여 사진 찍기에도 적절치가 않았어요. 천천히 하산을 시작하였습니다. 위에보다는 많지가 않았으나, 군데군데 무리 지어 있고 호젓하게 있는 진달래도 아름다웠습니다.
하늘에 구름도 비켜나니 하얀 뭉게구름이 선명하고 꽃도 새순도 햇살에 밝아져 더 곱게 보였답니다. 바다와 구름이 보이는 언덕에 앉아 해찰하며 여유를 부렸습니다.
하산길도 풍치가 있는 정겨운 길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많이 걸어보는 기분은 한 마디로 최고입니다. 오르는 자에게는 그 힘든 만큼 무엇인가를 보여준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자꾸 정상으로 오르나 봅니다.
기차 안에서 달걀도 까먹고, 김밥, 사이다를 사 먹으며 먼 길 가던 어릴 적 생각이 뜬금없이 나네요. 지루한 줄 모르고 가던 길. 진달래 길을 걷다 보니 힘든 줄도 모르고 걸었답니다.
한 잎의 여자 /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 2연 생략...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무심히 산에 다니지 않지요. 꽃송이를 사랑하고, 작은 새 소리에 즐거워하고 등산화 밑에 아주 작은 꽃송이를 무심코 밟기도 하지만 아까워하기도 하지요. 오늘도 촉촉하고 맑은 진달래 살빛에 반하여 사랑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지요.
제각각 개성대로 가지를 뻗고 있어도 아름다운 진달래 숲처럼 사람의 숲도 그러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서로 공간을 비껴가며 살며시 기대는 나뭇가지처럼 그리 살아가는 맑음이 있기를 바라면서, 늘 어긋나는 일상에 꽃을 꽂아 놓듯이 늘 함께 이기에 자신을 다듬어 갈 수 있는 긴장이 있어서 젊어진다는 생각의 성찰로 유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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