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선기 시인 첫 시집<호주머니속의 시>
어머니 오늘 오후 늦게
한 청년이 나무에 와서,
한참을 바라보다 갔습니다
나무는 이제 세상에 없는
청년의 반짝이는 맨발을
바라봅니다
어머니가 누워서 키우신 나무
제가 누워 온종일 보는 나무에는
검고 가벼운 집이 몇 채 겨울과
나무를 적시는 새의 자장가
언제나 떨어질 자세로 빛나는
휘어진 뼈들
어머니 오늘 오후 늦게
한 청년이 나무에 와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무를 지나서」
파리의 한 골목
젊은 릴케가 비틀거리는 생을 본 곳
근처 육군병원에서 넘어오는 바람에
죽음이 섞여 있다
죽음은 길 건너 맨드라미꽃들에도
피어 있다 구름이 제 그늘을 끌고 지나간다
누군가 흐느끼고
골목의 길들이 한순간 어두워졌다가
밝아진다.
깨진 포석, 장난감 가게, 허공의 알전구들
불빛을 뿌리고 있다
다다르기에
별은 너무도 멀다
시간을 공부하던 친구는 끝내
미치고 말았다
그의 주검을 ‘영원’이
거두어갔다
검게 차려입은 사내들과 여인네들이
서편으로 간다
12월이 온 것이다. ─「12월」
저녁의 운동장에서
낙엽이 깔린 긴 숲길을 보았다
저공의 그 숲에 놀던 어린 햇빛이
어두운 얼굴로 서 있고
쌀알 같은 새 한 마리 조용히 지나간다
이렇게 세상의 화면은 어두워지는구나
나는 붉은 얼굴로
내 발에서 자라는 뿌리 없는 우울을 보며
가난의 개념 같은 세월과 그 끝에 오래된 하늘을
지났다
운동장에 첫눈이 왔다
겨울의 수위실 옆 키 큰 나무야
그 송이들을 저지하지 마라
여러 날 쉽지 않은 추위가 만든 송이들
마냥 차가운 날에
나도 수많은 어휘가 되고 싶다
저기 키 작은 아이들이
두꺼운 옷을 입고
나무를 두드리네
눈이 쏟아지네 ─「언어의 온도」
검은 잎사귀의 9척 장신 나무가 우거진
새로 이사온 아파트가 어둡다
무슨 먼지가 이리도 많을까,
어머니는 온종일 먼지 걱정을 했다
한 해가 가도 먼지는 좀처럼 줄지기 않는다
집을 비운 날은 가구 위로
도무지 알 수 없는 먼지의 양이 있었다
나는 서걱서걱 눈을 굴리며 책을 읽었다
여름이 오자 어머니는 검은 잎사귀 나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어던 날은 목욕바구니에 수상한 잎사귀를
따 넣기도 했다 가을이 오고 어머니는
먼지가 되셨다
나는 먼지가 무서웠다
아내가 나가는 날이면 안양천변에서
공연히 산책을 했다
어린 여고생들이 둥둥 떠서 귀가를 했다
먼지가 몰려들 갔다
나는 먼지 하나 없는
두 손을 아내에게 내밀었다
주일 저녁 성당에서 모임이 있었다
아내가 정중한 교우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남편은 먼지 같은 사람이라고
솔직히 말했다 --<먼지>-
나무가 있고
사름이 있고
사슴은 점박이
뿔이 났구나
나무에 다가가서
코를 비빈다
나무가 있고
나비가 있다
나비는 점박이
더듬이가 높구나
커다란 나비가
나무보다 크다
어미 사슴이
떨어져서
아기사슴을 본다 --<백록담>-
하늘이 라면 국물처럼 가라앉았다
나는 원숭이처럼 나무가 그리워
나무 보러 간다
알 수 없는 마른 방울을
주렁주렁 매달고
애타게 물을 기다리는
무화과 나무
중형택사 기사가 노상에서
손님과 으르렁대고 있다
여자는 악을 쓴다
무화과 나무로 가는 길에
저 많은 구멍들,
나는 무슨 요술로
나무 그리워하는 물주머나일까
송진 같은 그림자도 거느리고 있는 걸까
무화과 한 잎이 가지를 놓았다
검은 도랑으로 가는 저 영혼,
물 흐르는 소리거 들릴 것도 같은 ---< 건조기>
저녁이 오면 창은
푸른 빛에 물들어,
세상의 밖에서
반짝 거린다
창에는
바람의 조각들,
큰 나무의 그늘과
추억들을 비추고
창은 아무도 없는
길모금에서
구름과 새의 날개들처럼,
멀리서 오는 바람의
소리를 듣는다 -- <창2>
나무가 아름다운 것은
아무도 무르는 깊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 깊이 속에
우리가 아직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나무를 우러르며
내가 걷는 것은,
내가 아직 그 무엇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를 우러르며>
■ 시인이 쓰는 산문(뒤표지)
겨울나무가 잎 하나 걸치지 않고 맨몸으로 서 있는 풍경이 보인다. 풍경이 다가와서 생각을 일으킨다. 그렇게 풍경이 말을 걸면, 나라는 그 누구는 또 실은 저도 풍경의 일부이면서, 對象을 받아들이는 몸짓을 한다. 그 몸짓을 놓아 버리는 연습을 하면서 詩를 생각한다.
겨울나무가 겨울나무와 함께 얼기설기 숲길을 가리고 있는 풍경이 보인다. 거기에는 미결정 상태의 무수한 의미가 들어 있다. 그 의미가 이 무의미하다는 세계를 살아 숨쉬게 하는지도 모른다.
萬象에 봄이 오면 시 아닌 것이 없을 터인데, 나는 그 꽃시절에 오늘의 풍광을 기억하고 싶다. 오늘은 내일의 시이고, 내일은 오늘을 제사 지내는 날이니 시의 언저리를 사랑하는 자에게 삶과 죽음이란 진즉 虛言일 뿐이다.
새삼스레 그런 경계 없는 속에서 즐겁게 만나고 싶다.
■ 시인의 말
들판 위 하늘에 걸리는 노을은
어디 멀리 갔다가 돌아오는 이의 얼굴 같다.
그 얼굴에는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는
무엇이 있어서 묵묵히 걷게만 하는데,
어느새 날이 저물며,
낮의 눈으로는 더는 따라갈 수 없는 곳으로
노을이 진다.
언젠가 저 노을을
부끄럼 없이 만나고 싶다.
2006년 가을
임선기
저자 및 역자소개
임선기
시인 임선기(본명 임재호)는 1968년 인천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파리10대학교에서 언어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94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