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뜰/마음자리

아름다운 소리

김낙향 2010. 9. 20. 00:14

 

아름다운 소리

 

 

비가 온다.

빗금을 그으며 온다. 흠뻑 젖어 축 늘어진 나무도 휴일 같다.

오랜만에 혼자 집에 있는 온전한 나의 날이지만, 끼니때가 되면 밥상을 차리지 않아도 되지만, 호젓하고 편안하지만, 벗어놓은 안경 렌즈에 여전히 내 눈이 박혀있어 온갖 것들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것은 주부라는 말이 내 몸속에 살고 있어 어슬렁거리며 구석구석을 살피다가 후줄근하게 느껴지는 옷가지와 커튼을 세탁기에 밀어 넣었다. 

여전히 비는 내린다.

창문에 비가 쓸어놓은 알 같은 물방울들이 올망졸망 부화하듯 움직이는 모습이 예뻐서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고 요리조리 각도를 잡다 보니 세탁기가 삐삐 호출을 한다.

커피 포터 버튼을 눌러놓고 빨래를 꺼내 서둘러 베란다로 나가다가 그만 주룩 미끄러졌다.

비만 오면 에어컨 실외기 호스를 타고 빗물이 숨어든다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충격받은 무릎은 얼얼하고 가슴은 쿵쿵 뛴다. 

튀어 오른 빗물이 수련 자배기를 덮쳐 물이 흔들리는데.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수련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고요한 모습이 얄밉도록 단아하다.

 

무안 연밭에 출사 갔다가 데려온 수련, 입양할 때는 제법 포동포동하였다.

낯선 환경이 힘들었던지 한동안 성장이 멈춘 듯하더니 요즘 제법 풍성해진 몸집에 귀티가 난다.

중후한 자배기에서 사는 수련은 별당 아씨 같아 우리 집에서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다.

그동안 활짝 피운 꽃을 봐주지 못해 미안해서 오늘은 옆에 있어 줄 요량이다.

베란다 문을 열어놓고 신선한 아침 공기를 먼저 쐬었다.

 

아침마다 명상에 든 그를 엿보고 출근하고, 퇴근하고 보아도 여전히 명상 중이었다.

오늘은 꽃잎 여는 모습을 보아야겠다. 

어느새 비도 그치고 하늘은 맑음이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수련 옆에 앉았다.

매일 먹던 일회용 커피인데 오랜만의 여유 때문인지 더 맛나다. 

 

햇볕이 성에 차지 않는지 수련은 베란다 쪽으로 한 20도 기운 자세로 하늘을 보고 있는 매무새다.

오전 10시가 다 되어서야 눈을 피해 겉적삼 한 잎이 빨쯤 열렸다.

커피를 다 마시는 동안에도 그 모습에서 더 진척할 기미가 보일지 않는다.

문간방에서 읽을 책을 뒤적이다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들고나왔다.

수련은 여전히 그 자세에 멈춰 있다.

책을 읽다가 연한 블랙커피 한 잔 더 탔다.

 

하늘은 푸른 페인트를 칠해놓고 뭉게구름 한 덩이를 집어넣었다 뺐다 하는 중이다.

오늘따라 구름도 솜사탕처럼 뽀얗고 달달한 맛이 느껴진다.

수련이 또 꽃잎 하나를 열었다.

내가 소리 없이 책장을 넘기면서 엿보지만, 어느새 살금살금 속살을 드러내는 수련. 문득 어릴 때 놀이가 생각난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책 한 장 넘기고 돌아보면 뚝 멈추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기필코 꽃잎 여는 것을 보려고 책을 내려놓고 쪼그려 앉았다.

수련과 나 사이에 침묵이 빽빽이 차오른다. 침묵의의 무게에 발이 저려서 다리를 펼 때 잎 하나 또 열렸다.

비밀스러움은 대대로 내려온 가문의 내력인가 보다.

꽃잎이 열릴 때 미동도 없었던 수면. 꽃봉오리를 감싸고 있는 물조차 모르게 피어나는 수련이다. 

 

조선 선조 때 송강 정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달빛을 가리고 지나가는 구름의 소리'라 하였으나, 백사 이항복은 제일 듣기 좋은 소리는 '동방화촉 좋은 밤에 아름다운 여인이 속옷 벗는 소리'라 했다.

 

아름다운 여인보다 더 고운 수련 아씨의 옷 벗는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내가 어쩌면 더 비정상인지.

기척도 없이 꽃잎을 여는 동안, 자배기 속 고요 한 톨도 건드리지 않는 수련.

고요를 뚫고 나오는 비법을 연수하느라 그토록 오래 물속에 있었던가. 미세한 진흙 알갱이 하나 흐트리지 않는다.

진흙에서 맑고 아름답게 피는 연꽃이라는 말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내공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으니.

물속에 머물면서 한 톨의 물도 탐하지 않아 어디 한 군데도 젖은 곳이 없는 몸, 요리조리 보아도 흠을 잡을 데가 없는 태에 매료되어 오랫동안 바라보는데, 예전에 무안 회산에서 연꽃잎차를 마신 기억이 떠올랐다.

 

내 속내를 읽은 듯

"그래요, 나의 향기를 마시려거든 자배기 물 한 톨 흔들리지 않게 꽃잎을 따시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낮 볕이 수련의 눈썹을 곰곰이 만지는 것을 보면서 슬그머니 서재로 들어가 서너 시간 책을 읽다가 나오니 수련이 꽃잎을 여미고 있다. 

 

수련을 지켜보면서, 지금까지 내가 피어나느라 부모와 형제, 주위 사람들의 고요를 흔들며 지낸 날을 돌아본다.

사느라 생각 없이 흔든 사람들을 생각하니 미안하기도 부끄럽기도 하다.

 

오늘 내가 본 제일 아름다운 소리는 물 한 톨조차 흔들리지 않게 꽃잎 여는 수련의 몸짓 소리이다. 

 

 

2004년 8월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