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물/시인들 시

문정희 시 / 물 만드는 여자 외 다수

김낙향 2013. 6. 11. 23:56

물 만드는 여자 / 문정희

 

딸아, 아무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며드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 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리고는 쉬이 쉬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 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 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는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곱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곱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위해

까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곱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남자를 위하여 / 문정희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결별한다.

딸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신이 나오는 길을 알게 된다

아기가 나오는 곳이 곧 신이 나오는 곳임을 깨닫고

문득 부끄러워 얼굴을 붉힌다.

딸에게 뽀뽀를 하며 

자신의 수염이 때로 독가시였음도 안다.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화해한다.

아름다운 어른이 된다. 

 

 

 

돌아가는 길 /  문정희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갈잎에게 /  문정희
 
 
가을 첫날엔
누구도
갈잎이 되고 싶으리.

빨갛고
가슴 버스럭이는
소롯한 갈잎.

하늘이
환각제를 섞어 뿌리는
이런 갈날엔

젊은 가을 사람은
외출해선 안 되리.

갈나무에 매달려
조용히 흔들리며

그냥 그대로
색 바래야 하리.


 

 

지하철 정거장에서 /  문정희
 
 
귀기울여 보면
그대 가슴속에는
눈물말고도
아름다운 무인도가 하나 있어서
사시사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문 열어 두고 있다

나는 무인도에 가고 싶었다
자유가 너무 많아
숨막히는 무인도
그곳에 가서
진종일 내리쪼이는
햇살 아래 몸서리치며
그대와 함께
새털로 부서지고 싶었다.
소멸하고 싶었다.

 

 

 

시(詩)가 나무에게   /  문정희
 
 
나무야, 너 왜 거기 서 있니?
걸어 나와라
피 흘려라
푸른 심장을 꺼내 보여다오
해마다 도로 젊어지는 비밀을
나처럼 언어로 노래해 봐
네 노래는 알아들을 수가 없지만
너무 아름답고 무성해
나의 시 속에 숨어 있는 슬픔보다
더 찬란해
땅속 깊은 곳에서 홀로
수액을 끌어올리며 부르던 그 노래를
오늘은 걸어 나와
나에게 좀 들려다오
나무야, 너 왜 거기 서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