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대로 살고 멋대로 써라 / (이승훈)
멋대로 살고 멋대로 써라 / (이승훈)
1
미친 시인들, 시마에 홀린 시인들 의미를 모르고 의미와 싸우고 의미를
모른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오 빌어먹을 의미 의미 의미 찾다가 망하는 게
인생이다. 비가 그치고 아파트 창에 저녁 해가 물든다. 그럼 지금 쓰고 있는
글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쓰는가? 나도 조
금은 미친 것인가? 병든 화상이 오후면 작은 방에 앉아 글을 쓰지만 천 년 뒤에
남을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다. 몇 년째 골다공증으로 고생이고 언제 또 위험
이 재발할지 모르는 암 환자가 몇 달째 계속되는 어지럼증으로 말이 아닌 화
상이 되지도 않는 소리나 하는 게 한심하고 우습다. 난 오늘도 어지럽다.
2
그는 세익스피어보다 13년 늦게 태어났지만 그보다 24년 더 살고, 옥스퍼
드대학을 졸업하고 우대장학생 신분으로 대학에 남아 공부만 하다가 죽었
다. 그는 여행을 한 적이 없고, 결혼도 안 하고, 성공도 바라지도 않고, 책 한
권 쓴 일 외에 세속적인 성공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일생동안 남들이 쓴 책
만 읽다가 죽었다. 그가 우울증에 대한 괴상한 책을 쓴 건 그도 우울증에 시
달렸기 때문이다.
3
비 오는 밤 공연히 심란해서 여기 저기 전화를 하지만 아무도 받지 않는
다. 읽던 책 한 페이지 뜯어 책상에 놓고 바라본다.“선생님 생각을 했어요.
새가 울어서.”외국에서 편지 보낸 김 선생 생각도 나고 당나라 미치광이 시
인 한산이 절간 부엌에 앉아 불 지피며 하하 웃던 생각도 난다. 비 오는 밤 비
오는 밤 문득 일어나 벽 거울 보고 돌아온다.
(2012년 《시와세계》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