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물/시인들 시

달력의 거리 / 손미

김낙향 2014. 1. 6. 16:12

달력의 거리

 

 

(손미)

 

 

달력 위를 걷고 있었네 늘 그랬듯이

이제, 저 귀퉁이를 돌면 검은 바위 뒤 나무 의자

그것은 사방무늬를 그리는 아가씨의 것

곧 쏟아질 것 같은 목을 열고 나오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나요?

잘못 타서, 고향에 가다가, 기차 같은 몸을, 몸을 잘못 타서

검은 빨강 사방무늬 위를 걷고 있다네

짐승 같은 귀퉁이를 돌면 또 다른 귀퉁이 또 다른 귀퉁이

검은, 검은 빨간 짐승은 숨을 죽이고 잠복하고 있네

이제 나는

쫓는 길이었는지 쫓기는 길이었는지

잊었다네 아가씨여

 

계속 걷고 있었네 늘 그랬듯이

매일 형상이 바뀌는 짐승을 사냥하면

우리는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

 

그러나 돌아보면 다시, 이곳은

언젠가 건너갔던 네모 같지 않은가

 

 

 

 

현대문학, 2012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