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저녁의 수채(水彩) 외 / 박서영
봄날 저녁의 수채(水彩)
박서영
가난한 지붕은 어쩌다가 가난한 지붕을 가졌을까 하고,
하늘 펜션과 별빛 펜션은 어쩌다가 하늘과 별을 가졌을까 하고,
펜션의 반짝이는 불빛 옆, 불 꺼진 지붕들은 누가 주인일까 하고,
계절과 계절의 경계는 수채처럼 번지고 뒤섞여
겨울인지 봄인지, 시간은 접었다가 펼치기를 반복한다
삼월에도 일어나지 않는 개구리를 깨우거나
땅을 몇 번 두드려 송이버섯을 잠에서 깨어나게도 한다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봄을 깨우고 있는 것일까
이 세상의 모든 어휘들은 반쯤은 따뜻하고 반쯤은 차갑다
반쯤은 말랑말랑하고 반쯤은 딱딱하다
어둠의 실루엣들이 뒤섞여 흐릿해지니 좋다
겨울 지나 봄이라고 고로쇠 물 한 통 비우고 나오는데
여름과 가을이 내 몸의 연장통에서 심장을 꺼내 달아난다
심장은 방금 지나쳐온 천막집 의자에 앉아 뛰고 있다
불 꺼진 천막집은 어쩌다가 궁핍한 추억을 가졌을까 하고,
비 내리면 계절은 번지고 뒤섞여 왜 수채(水彩)가 되는가 하고,
구름치 버스정류장
박서영
네가 떠나자 빈 방이 생겼다고 구름치 버스정류장에 살고 있는 새가 말했다. 어쩌다가 이곳에 살게 되었는지 궁금했으나 그건 내 슬픔과는 무관한 일. 나는 구름치에서 방 한 칸을 구하고 하룻밤 자고 떠나면 그뿐이다. 어쩌다가 내가 이곳에 내리게 되었는지 새는 궁금할 만도 한 데, 그건 정류장 의자에 앉아있는 새와는 무관한 일. 구름이 구름의 시간을 넘어간다. 구름은 짓다만 집의 창문이 되고, 시골버스에서 내리는 낯선 손님이 되고, 손님은 그 정류장의 이름이 된다. 나는 내린다. 정류장 의자 밑에서 참새들이 날아오른다. 지저귄다. 네가 떠나자 빈 방이 하나 생겼을 뿐이라고.
*구름치: 전남 장흥군 장흥읍 금성2구 구름치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