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물/시인들 시

입술 / 허수경

김낙향 2014. 5. 16. 15:11

 

 입술 

 

 

      허수경

 

 

  너의 입술이 나에게로 왔다
  너는 세기말이라고, 했다
 

  나의 입술이 네 볼언저리를 지나갔다
  나는 세기초라고, 했다
 

  그때 우리의 입김이 우리를 흐렸다
 

  너의 입술이 내 눈썹을 지나가자
  하얀 당나귀 한 마리가 설원을 걷고 있었다
 

  나의 입술이 너의 귀 언저리를 지나가자
  검은 당나귀 한 마리가 석유밭을 걷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거리의 모든 쓰레기를 몰고 가는 바람
 

  너의 입술이 내 가슴에서 멈추었다
  나의 입술이 네 심장에서 멈추었다
  너의 입술이 내 여성을 지나갔다
  나의 입술이 네 남성을 지나갔다
  그때 우리의 성은 얼어붙었다
 

  말하지 않았다
  입술만 있었다
 

 

 

 

 

 

 

 

 


 

계간 『문학동네』 2005년 겨울호 발표

 

 

 

허수경 시인

1964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87년 《실천문학》복간호에 시가 실리면서 등단. 시집으로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와 수필집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그리고 번역서 『끝없는 이야기』가 있음. 2001년 제14회 동서문학상을 수상. 현재 독일에 거주하며 뮌스터 대학에서 고대동방고고학 공부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