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구의 언어로 말하기/ 송종규 시인
불구의 언어로 말하기 / 송종규
압력을 이기지 못한 주전자가 뚜껑을 들썩거리며 끓어오른다. 소리치고 싶은 내 문장 속의 남자들처럼.
검은 커튼 뒤에는 푸른곰팡이와 남자들의 욕망이 은밀하게 뒤엉킨다. 그들은 아주 가끔씩 내 문장 속으로 발을 밀어넣는다. 은밀하게 나는 그들을 맞아들인다.
정신의 뜨거운 팽창이, 그 무한의 에너지가, 삶을 끌고 갈 수는 없을까. 주체할 수 없는 뜨거운 세계의 정제된 에너지들이 비로소 문자로 표현될 수는 없을까. 그럴 수 있다면, 마침내 하얗게 식은 정갈한 재가 남아서, 내 삶과 문학을 완성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뜨겁게 타올라 마침내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을 때, 거기,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은 한 줌의 자유가 고요히 놓여있을 것이다.
라캉의 말을 빌린다면, 이 뜨거운 팽창은 `아버지의 권위가 주관하는 <상징계>`를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에너지가 될 것이며, `외디푸스` 과정의 혼란스러움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내게 있어서 이 정신의 팽창은 결국, 상징계(프로이트/아버지)의 부정이고, 질서의 부정이자 초극이며, 다시 後 외디푸스적 욕망이다. 문학이 어차피, 당대의 언어를 빌어야하고 당대의 문화적 토양 위에서 피어나는 것이라 하더라도 초극과, 현실에 대한 부정과 회의는 시인의 양식이다. 다시 라캉의 말로 하면 문학은 제일의 기표, 즉 아버지의 상징으로부터 자유로워야하며 그 말은 결국, 외디푸스 콤플렉스에 묶이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문자를 통해서 내가 드러내고 싶은 세계는, 前 외디푸스나 後 외디푸스로의 轉移나 구획지음이 아니라 이 이질적인 층위들이 자연스럽게 섞이는 그 접합점이다. 그것은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뜨거움이고, 팽창이고, 상징계과 상상계의 접점이고 욕망과 죽음의 혼융이다. 그것은 불구의 세계이고, 가장 아득한 곳에 찍힌 하나의 부호이다.
의자는 수런거리지 않고, 전화기는 아무도 불러내지 않고, 계단은 어디로든 오르내리지 않고 모른다, 모른다고 소리치던 책들의 입은 단호하게 잠겨있다 계단은 천년을 거기 있었고, 누군가 천년을 오르내렸고, 모든 관념들은 지느러미처럼 자유롭게 유영했다 시간은 분해되고 융합되고 높이 솟구치고 고요히 가라앉고 한없이 아득한 깊이 속에서 사람들은 금붕어처럼 잠들었다 수족관 속 금붕어들이 천리 밖 늪의 수면 위로 보름달만한 가시연꽃을 밀어올렸고 붕어의 알과 가시연꽃 씨방과 자유로운 시간의 무늬들이 죽음과 소요를 떠밀고 간다.
그 아래,
세상의 모든 옷걸이들은 무표정하게 앉아있고 쭈그리고 앉아있고 다리를 포개고 조그맣게 누워있고 나는 침착하게, 모든 주검들의 입에 박힌 못을, 빼낸다, 살아서 펄럭이는 말들의 입에 쾅쾅 못을 박는다, 나는 설득 당하지 않는다
-「망치」전문
종이 울리는 연못
걷고 싶은 사전
변기 속의 숟가락
울리고 싶지 않은 알람, 알리바이를 부정하는
장미의 죽음
종일 비가 내리고 머리통 속은 빗물로 가득 찼다 불어난 물이 플라스틱 바가지 밖으로 흘러 넘쳤다 바가지 위에 둥둥 꽃잎이 떠다녔다 꽃잎은 상처, 꽃잎은 겨울, 꽃잎은 어머니, 우우우 꽃잎은 흘러간 내 사랑 너무 큰 그림자 하나가 머리통 속으로 다 들어오지 못했다 끅끅거리며 시간은 쓸려가고 제 작은 그림자 속에서 아이는 고봉밥 한 그릇을 다 비운다 나는 어린 고무신 뒤축을 안으로 말아 넣어 바가지 위에 띄웠다 바가지는 어디로 간 것일까, 쓰디쓴 세월이 맨발을 할퀴고 지나갔다
종이 울리는 연못
걷고 싶은 사전
변기 속의 숟가락
울리고 싶지 않은 초인종
알리바이를 부정하는
바가지, 바가지 위의 꽃잎, 또 꽃잎
-「종이 울리는 연못」전문
시 속의 모든 소품들은 더 이상 상징계를 허용하지 않고, 배반과 저항과 죽음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어떤 질서 속에도 편입되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모두 불구이고 나는 결국, 불구의 언어로 불구의 시를 쓴 셈이다. 라캉은 아주 명증한 언어로 구조주의 철학을 정립했고, 프로이트를 계승했다. 그러나 나는 그를 내 시 속으로 불러들여 불구의 언어로 불구의 세계를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요란하게 들썩거리면서 주전자가 끓고 있다. 저 작은 세계가 한없이 팽창해서 마침내 모든 걸 다 비우고 나면, 주전자는 가벼워질 것이다. 타자와 타자, 성과 성, 주체와 객체의 간극이 없어졌을 때, 삶 또한 저와 같이 가벼워질 수 있을 것이다. 폭발할 듯 모든 것이 증발되고 마침내 아무 것도 남지 않을 때, 거기,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은 한 줌의 고요가 놓여있을 것이다. 그것을 자유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진정 자유로운가.
적어도 방법론에 있어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해체다 해서 수많은 시인들에 의해서, 이미 실험되고 시도되고 있다. 주체와 객체의 혼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전복, 기본형식의 파괴등 현란한 실험들이 우리 시의 현주소라 해도 별로 틀리지 않다. 그런 실험들은 결국, 형식과 전통이라는 <상징성>을 벗는 것이고 상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다시 유연하며, 크며,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예술작품에서,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말할 때 형식과 방법의 문제에서만 출발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인간의 원초성과 연결하는 진실한 코드로서의 문학을 말해야 한다.
통사구조의 해체나 시니피앙을 전면에 내세운 언어 유희들이, 결국, 고도의 현학적이고 지능적인 유희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는 시인의 자존심이 결국, 문학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뜨거운 말로 세계를 읽기 위해서 정신은 무한히 자유로워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아버지의 상징`으로부터 벗어나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실험하고 빠지고 미끄러지는 모순 속에서, 시인들은 모순과 의혹 투성이의 삶을 견디고 있다. 前 외디푸스와 後 외디푸스의 접합점에서, 무수한 타자들과 타자들인 자아와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그것들은 아주 다른 층위의 객체들이기도 하며, 오직 하나인 우주이며, 하나이면서 다시 수많은 객체이며, 세계이면서 또한 세계의 티끌인 원소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논리도 직관을 앞지를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직관의 힘을 신뢰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 문학은, 논리가 직관 앞에 놓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혼란과 질문의 노정에 나는 쉼표처럼 앉아서, 저 팽창된 주전자가 끓인 뜨거운 커피를 목으로 흘린다. 이 뜨겁고, 향기롭고, 쓰디쓴, 경험에로의 편입과 불화가 내 시이고, 내 시 속의 라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