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뜰/마음자리

어머님 전 상서

김낙향 2015. 8. 26. 17:19

 

어머님 전 상서

 

 

팔순 나이가 되어도 당신은 서른 즈음에 갇혀 있었지요.

현실을 지우고 오래전 기억이 생생한 수채로 팔순 당신을 휘감아 옥죄여 좁아지다 못해 침해에 묶인 생.

장롱 밑에 군불을 지피는 평화로운 아침부터 줄기차게 이삿짐을 옮기는 굽은 등, 지친 기색을 입술 물집으로 말하는 당신.

뜬눈으로 *하기스를 분해하고 반죽한 변을 벽 틈에 쑤셔 넣은 까만 손바닥과 문손잡이와 마주친 새벽, 눈처럼 쌓인 하기스 솜 분량에 놀라고 섬세한 당신의 손작업에 놀랐습니다.

까만 손바닥과 문손잡이에 묻은 변은 잘 굳은 유화 물감 같아서 놀랐고, 냄새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밤샘 작업한 당신의 비결에 더더욱 놀랐습니다. 

수없이 손님처럼 찾아오는 기억을 맞이하느라 집안의 질서는 깨지고 서로 눈치를 살펴야 하는 긴장이 지속하였다는 분위기 당신이 모르셔도 되지만 말을 해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아서요.

김치 버무리는 모습을 바라보던 어머님이 '맛나겠소. 아주머니. 아랫집에도 한쪽 주고 자시오' 했을 때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속 상함보다 이 와중에도 나눔을 잊지 않은 마음에 가슴이 먹먹했답니다.

병원 링거병을 조기라고 우기시며 침상에 누워 종일 팥죽 쑤시던 중환자실을 상기하면 지금도 콧등이 시큰거립니다.

놀이터에 버려진 신문지를 죽은 강아지로 보시고 거두어주려고 이 층 난간에서 허공을 내딛으려던 순간 이후 저는 밤낮 당신 곁을 떠난 적이 없지요. 

저를 황당하게 하신 수년의 사건들을 어찌 다 나열하겠습니까마는 사건 터질 때마다 남편 눈치, 아이들 눈치를 보아야 하는 저는 괴로움을 참고 또 억눌러야 했으니까요. 내 짜증과 고함은 애들을 바람처럼 당신에게 달려가게 하였지요. 하느님보다 점점 더 무서운 건 아이들이었으니까요.

 

 빨강 저고리와 초록 치마에 새겨진 내력부터 이끼 낀 누각까지 고단하게 펄럭이며 노 저으시는 당신 불거진 힘줄이 제 누각을 당신 현실 속에 같이 수몰시킨 것 아마 모르실 겁니다.

5년째 되는 어느 초여름 신부님께 종부 성사 받은 날 이후로 달라지셨지요.

짐을 잔뜩 싣고 덜컹거리며 달리는 트럭 같던 당신은 간데없고 휴식에 든 빈 트럭이었지요.

그늘 한 점 없는 모습, 고요한 연못 같은 눈빛. 추억과 현실 삼각점 허공을 늘 주시하고 있어 제가 읽어낼 수 없는 경계에 드신 모습이었답니다.

라일락 꽃잎에서 자고 일어난 한숨 잠처럼 고단할 필요도 없는 외로움도 슬픔도 회한도 없는 것처럼 말갛게 앉아서 조금씩 조금씩 뿌리를 말리고 계셨지요.

몸을 씻겨 옷 갈아입힌 후 누워계신 모습은 세상에 살 베인 적 없는 아기처럼 평온하였답니다.

나와 눈 마주치면 눈꼬리로 흘러내리는 당신 눈물은 성수였어요.

힘들어 지친 무게가, 목을 옥죄던 고통도, 창살 없는 속박도 다 사라졌답니다.

그렇게 같이 눈 마주치며 마음에 얼룩 다 지우고 일 년을 더 견디다가 가신 어머니는 저를 반석 위에 앉히고 가셨다는 것을 돌아가신 후에야 알았고. 어머니로 인하여 제가 철이 들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고통도 견딜만한 사람에게 주신다는 수녀님 말씀이 새록새록 생각납니다.

 

숙제를 다 마친 마음으로 남편과 내 아이들과 여유를 즐길 수 있는 평화와 내 생전에 사랑의 기도를 간절하게 가르치신 분이 당신입니다.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하고 나니 후련합니다.

제 꿈에 찾아오지 않으시니 저승에서는 재미있게 지내시나 봅니다. 

늘 평안하소서. 

 

*하기스 : 유한킴벌리 기저귀 제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