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뜰/마음자리

해파랑길 길목에서

김낙향 2017. 4. 1. 23:45

해파랑길 길목에서

 

바다, 지난주보다 약하긴 하나 너울 파도는 여전히 밀려든다.

밀려들어 바위에 부닥쳐 터지는 백색 함성에서 튕겨 나온 소리의 파편이 반사적으로 튀어 올라 자지러지자 다시 거두어 품어주는 바다. 어쩔 수 없이 보듬을 수밖에 없는 관계라는 것은 알지만 가늠할 수 없는 수심의 시퍼런 수채에서 사랑은 상처받기를 허락한 것이라는 문자가 문득 생각난다.

 

생겨나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지만, 나날이 이어지는 생에서 부상하는 희로애락은 스스로 감당해야 할 무게인 것을.

 

한 여자가 배 한 척 보이지 않는 망망한 바다를 해변에서 바라보고 있다. 뒤따르던 발자국을 옆에 나란히 놓고서.

파도는 기필코 여인의 발자국을 지우려는 듯, 허연 이빨을 드러내며 거듭 달려들고, 여인은 미동도 하지 않고 머플러만 휘날리게 한다.

미세먼지인지 옅은 안개 때문인지 풍경도 점점 무거워진다.

왼쪽에는 갈매기들이 줄을 맞춰 조례를 하듯 모여있고 몇 무리는 뒤에서 해찰하고 있다.

 

나는 돌 축대 끝에 푸른 치마를 나풀거리며 바다를 향하고 있는 민들레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바닷바람이 제법 춥다.

민들레꽃 색은 매일 마주 보는 일출의 영향을 받아선지 찬 바닷바람 탓인지 불그레한 빛이 도는 노란색이다.

민들레는 수평선에서 밀려드는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 갈매기 소리와 여인의 머플러 펄럭이는 소리, 내 숨소리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듯 바다 쪽으로 20도 각을 세우고 있다.

그 민들레 옆에서 나는 오전에 영덕 죽도산 전망대에서 만난 꽃 소식을 소곤거렸다.

활짝 핀 개복숭아꽃, 통통하니 살찌고 있는 해국, 해맑게 자라고 있는 땅채송화 아기들의 풍경을. 꽃 피면 출사 올 계획이라고.

 

어느새 여자는 바위로 옮겨 앉았고 그녀를 따라오던 발자국은 밑에서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다.

 

갯가에서 생선을 다듬던 남자가 바닷가로 내려가 찌꺼기를 훨훨 뿌린다.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해변, 나는 갈매기 날갯짓 풍경을 찍느라 일어서고 여자도 소리 따라 돌아서고.

찍은 사진을 확인하는 사이에 여인은 사라지고 주인 잃은 발자국만 나란히 있다.

 

민들레 초상화 하나 찍어주고 일어나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축산항에서부터 해파랑길을 걷는 남편과 오늘 코스 끝 지점인 영덕 해맞이공원에서 만나기로 했기에.

 

 

17 / 3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