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 / 남편 외...
남편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응 / 문정희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 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나는 나의 문자
"응"
동그란 해로 너 내위에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방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해와 달
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응"
혹 / 문정희
자궁 혹 떼어낸 게 엊그제인데
이번엔 유방을 째자고 한다
누구는 이 나이 되면 권위도 생긴다는데
내겐 웬 혹만 생기는 것일까
혹시 젊은 날 옆집 소년에게
몰래 품은 연정이 자라 혹이 된 것일까
가끔 아내 있는 남자를 훔쳐봤던 일
남편의 등뒤에서 숨죽여 칼을 갈며 울었던 일
집만 나서면 어김없이
머리칼 바람에 풀어 헤쳤던 일
그것들이 위험한 혹으로 자란 것일까
하지만 떼내어야 할 것이 혹뿐이라면
나는 얼마나 가벼운가
끼니마다 칭얼대는 저 귀여운 혹들
내가 만든 여우와 토끼들
내친김에 혹 떼듯 떼어버리고
새로 슬며시 시집이나 가볼까
밤새 마음으로 마을을 판다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앞다투어 수십 년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치마 / 문정희
벌써 남자들은
그곳에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기는 있다
가만두면 사라지는 달을 감추고
뜨겁게 불어오는 회오리 같은 것
대리석 두 기둥으로 받쳐 든 신전에
어쩌면 신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흥망의 비밀이 궁금하여
남자들은 평생
신전 주위를 맴도는 관광객이다
굳이 아니라면
신의 후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 족보를 확인하고
후계자를 만들려고 애쓴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다
여자들이
감춘 바다가 있을지도 모른다
참혹하게 아름다운 갯벌이 있고
꿈꾸는 조개들이 살고 있는 바다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죽는 허무한 동굴?
놀라운 것은
그 힘은 벗었을 때
더욱 눈부시다는 것이다
성에꽃 / 문정희
추위가 칼날처럼 다가든 새벽
무심히 커튼을 젖히다 보면
유리창에 피어난, 아니 이런 황홀한 꿈을 보았나.
세상과 나 사이에 밤새 누가
이런 투명한 꽃을 피워 놓으셨을까.
들녘의 꽃들조차 제 빛깔을 감추고
씨앗 속에 깊이 숨 죽이고 있을 때
이내 스러지는 니르바나*의 꽃을
저 얇고 날카로운 유리창에 누가 새겨 놓았을까.
하긴 사람도 그렇지.
가장 가혹한 고통의 밤이 끝난 자리에
가장 눈부시고 부드러운 꿈이 일어서지.
새하얀 신부 앞에 붉고 푸른 색깔들 입 다물듯이
들녘의 꽃들 모두 제 향기를
씨앗 속에 깊이 감추고 있을 때
어둠이 스며드는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누가 저토록 슬픈 향기를 새기셨을까.
한 방울 물로 스러지는
불가해한 비애의 꽃송이들을.
* 니르나바 : 모든 번뇌의 얽매임에서 벗어난 경지인 열반을 뜻하는 말.
비망록 / 문정희
남을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갈대숲을 지나며 / 문정희
처녀 시절이여, 안녕
나에겐 증거처럼
웨딩드레스를 입고
수염자리 의젓한 신랑의 팔을 끼고 서 있는
한 장의 결혼사진도 있지만
이상도 하지
나는 한 번도 결혼한 여자가 아니었네
유부녀는 더구나 아니였네
방목해서 키운 튼튼한 아이들
넉넉한 평수에 편리한 부엌의 안주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처녀였다네
집안에서 잠시 아내이다가
현관문을 나서면
어김없이 다시 처녀가 되었지
사람들은 모르지
세상엔 결혼한 여자가 없다는 것을
모든 여자가 독신이라는 것을
세상이 가지 자로는
재어지지 않는 넓이와 크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웨딩드레스 입고 사진 찍은 여자를
결혼한 여자라 묶어 버릴 뿐이지
1947년 전남 보성 출생.
진명여고 재학시 시집 <꽃숨> 발간.
동국대 국문학과 졸업. 같은 대학원 졸업.
196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새떼』『 『남자를 위하여』『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오라, 거짓 사랑아』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아우내의 새』
『나는 문이다』외 다수.
산문집 <젊은 고뇌와 사랑> <청춘의 미학> <사랑의 그물을 던지리라> 등.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현대문학상 등 수상. 제40대 한국시인협회 회장
현재 동국대 문예창작학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