痛哭 痛哭 奴婢詩人 <雪竹>이시여........(옮긴글)
痛哭 痛哭 奴婢詩人 <雪竹>이시여........
잊혀진 이름 설죽(雪竹),
이땅에서 남겨진 여류한시 2천여수중 8.3%인 166수를 남기고도 여종이란
신분 때문에 가맣게 우리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구천을 떠도는 이 불행했던 영혼 앞에 나는 삼가 옷깃을 여미고 통곡한다.
설죽은 권벌의 손자인 권래(權來)의 시청비(侍廳婢)였다. 권벌은 봉화 닭실
사람으로 명종때 사림파로 유일하게 조광조 개혁정치에 참여 했다가 윤형원에
의해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삭주로 유배, 거기서 삶을 마감한 대쪽같은
대선비다,
설죽의 시는 유곡삼절(酉谷三絶)로 회자되는 권상원의 백운자시고(白雲子詩稿)
말미에 실려 우리에게 전해진다. 그러나 아무도 읊는이가 없어 잡초만 우거진
고분(孤墳)처럼 철저하게 외면 당했다. 누구시 못지 않게 주옥같은데도 이조란
계급사회의 여종이란 시뻘건 화인(火印) 때문에.
사대부들이 수업 하는곳을 서성거리며 천재적 머리로 문장과 한시(漢詩) 기법을
터득하고 타고난 자기의 문학역량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그리움과 고독을 절제된
언어로 실타래처럼 풀어내며 인고의 세월을 시로 승화 시킨 참 보기 드문 여류였다.
설죽은 호방한 성격으로 여종의 예속적인 삶을 거부하고 어린 열다섯 나이에 집을
뛰쳐나와 당대 명망있는 선비들과 시작을 겨누며 신분의 굴레를 초극할려고 발버둥쳤다.
그럼 설죽을 울리고 울린 한반도에서의 노비란 신분은 무엇 이었든가?
노비는 땅과 함께 사족(士族)의 2대 경제기반 이었다. 이땅에서 노비발생 기원을
알려주는 기록은 기자(箕子)의 <팔조법금 八條法禁>으로 알려져 있다.
참 역사가 유구 하다는 증거가 아닌가! 사족에게는 노비의 유무내지 그 수가 가운성쇠에
직결되는 판단 기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위의 팔조법금에 적힌대로 노비가
발생되는 이유는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전쟁이 가장 큰 원인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족과 국가의 노비에 대한 이해관계가 아주 상반 되는걸 발견한다.
려말(麗末) 극도로 문란했던 노비, 사전(私田)문제에 아주 고심했던 이성계의
즉위교서에도 이문제가 잘드러나 있다. 국왕은 노비가 비록 천인(賤人)이지만
신민(臣民)으로 파악했고 사족들은 정반대의 입장을 견지했다.
하위지 김종직등등 역사에 양심들 이라고 분류되는 인물들 까지 노비는 신민이
아니고 그저 하나의 경제적 이해관계의 종속물로 인식했다는것은 이땅의 비극이다.
격렬히 대립했던 훈구파와 사림파도 이점에서는 입장을 같이 했다.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할수없는 역사의 한 모습이다.
노비의 종류에는 가내사역과 농경등 생산분야를 책임졌던 주거노비와 사족의 집 밖에
살며 일정한 신공(身貢)만 상납하면 되는 외거(外居)노비등 여러종류가 있었다.
내가 한없는 동정의 시선으로 바로보는 설죽은 솔거노비(率居奴婢)에 해당 된다.
솔거노비는 또 시중, 수행(隨行)과 순수한 가사노동등 두가지 기능을 맡았는데 시인은
그중에서도 시비(侍婢)라고 사랑방에서 비첩(婢妾)으로 성적 대상이 되거나 주악(奏樂)
가무(歌舞)까지 책임지고 주인의 정서적 충족을 만족 시켜야 하는 성비(聲婢)였다.
그녀의 시 <기칠송寄七松>을 보면 알수있다.
나중에는 결국 석전(石田) 성로(成輅 1550-1615)의 비첩이 되어 주옥같은 연시(戀詩)를
남긴다. 심지어 성석전이 설죽과 사랑에 빠져 벼슬길도 마다 했다니 여종의 신분으로
불태웠던 뜨거운 정렬에 나는 한없는 찬사를 보낸다.
성석전은 송강 정철의 문인으로 시에 능했고 스승인 송강의 기구한 유배생활에 좌절하고
친구 권필의 요절에 삶의 무한한 희의에 빠져들어 술과 시로 한세상을 마감한 위인 이다.
성석전이 먼저 설죽의 미모와 시재(詩才)에 빠져든게 아니고 설죽의 그 호탕한 기질이
남자를 사랑해서 시작된 능동적 사랑 이었다.
성석전이 봉화 닭실의 청정암에 묵을때 노비의 신분인 설죽이 먼저 반했다는 이야기.
이쯤이면 나는 큰 박수를 안칠수가 없다. 그 재색에 또 화통한 몸짓에.
청정암에 모였던 좌객들이 설죽의 연정을 눈치체고 조건을 제시했다.
성석전을 위한 생전 만시(輓詩)를 지어 좌중을 울리면 사랑이 받아들여지고
시침(侍寢)까지 허락 한다는.
설죽이 좌중을 울린 만시는 아래와 같다.
당신도 울지 않으면 당신은 목석이다. 울어라!
적막한 서호의 초당문 닫혔고
주인 잃은 봄 누각에 벽도향만 흩날리네
푸른 산 어디에 호걸스런 뼈를 묻으셨나요
무심한 강물만 말 없이 흘러가네요.
寂寞西湖鎖草堂
春臺無主碧挑香
靑山何處埋豪骨
唯有江流不語長 ( 哭挽 成進士 石田)
애틋한 정서가 배어 난다. 기(起)와 승(承)句에 임이 떠난 서호 초당에 봄이 찿아 들었지만
주인 잃은 처량감이 가슴을 적신다. 굳게 닫힌 초당문에 콘트라스트로 나온 벽도향은 인생의
무상을 이야기 하는 한시의 구도다. 설죽의 정감은 전구(前句)에 치솟아 죽은 임에 대한 애절감이
고조되고 있다. 여기에 임을 사별한 여심을 감정 이입 시켰다. 그 애절한 마음은 결구(結句)에서
자연으로 한걸음 옮겨진다. 삶의 유한, 사별의 아픔과는 무관하게 강물은 흘러 흘러 애상속으로
설죽의 애절한 마음을 떠나보낸다.
성석전과 주고 받은 설죽의 시는 20여수나 권상원의 <백운자시고>에 남아 있다.
남산의 잠령은 연하의 주인격이고
석전 당신은 시의 주인이어요.
서로 만나 취하기도 전에
달이 양화진에 떨어 진다오.
蠶嶺煙霞主
石田詩主人
相逢不覺醉
月墜楊花津
낭군님 떠난 뒤에 소식마져 끊긴 채
봄날 청루에서 홀로 잠들어요.
촛불 꺼진 창가에서 무한히 우는 밤
두견새 울고 배꽃도 떨어져요.
郎君去後音塵絶
獨宿靑樓芳草節
燭盡紗窓無限啼
杜鵑叫落梨花月
벌레 울음 그치자 등불 꺼지고
주렴이 흐릿하게 새벽 안개 가르네
고향이 어디쯤일까
창가의 달만 하늘에 남았어라
土蟲消盡暗虹花
簾幕依俙隔曉霞
鄕國不知何處是
半窓殘月在天涯
타향에서 병들어 더욱 슬픈 가을
편지 한 장에 온갖 사연 담아요
천리 고향 돌아갈 계획 아득하니
홀로 누워 하염없이 울기만 해요
天涯臥病倍悲秋
一片家書萬抖愁
千里故園歸計阻
不堪孤枕淚隻流
충재 권벌은 나와도 떼지못할 인연이 있다. 내 외조모가 이집서 오셨다.
또 내 사촌 9회 직현이의 외가도 이집 이다.
서창(書窓) 너머 봄은 쏜살 같이 흐른다.
닭실사람들 그 넓은 앞뜰에 설죽 시비 하나 왜 못세우나? 어설픈 가문(紋章)은 만들며.
내 유가(儒家)의 후예로 꿈속에서 나마 설죽을 만나 울지말라고 어깨라도 토닥여 주고 싶다.
통곡 통곡 하며.
APR 16 2011
안양서 씨야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