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漢詩)

설죽을 알아가는...

김낙향 2018. 10. 6. 11:42

 

봉화 유곡 청암정에서 성석전과 첫 만남의 인연으로 설죽은 성석전의 비첩이 되었다.

석전은 당대 최고의 문인이자 정치가였던 송강(松江) 정철(鄭澈) 문하의 수제자로 석천(石泉) 권래(權萊)와 교류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녀의 시에 비추어보면 설죽은 한강 서호(西湖) 및 양자강(지금의 양화나루 인근)을 배경으로 서호정 주인인 석전과 약 10년 정도 함께 햇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병억산가(病億山家)

 

강남의 가을비 쓸쓸히 내리고 江南秋雨正淒淒 (강남추우정처처)

하늘 멀리 병든 몸 눈물만 나와요 臥病天涯無限啼 (와병천애무한제)

안동에 제 집 있어도 가질 못하고 家在福州歸未得 (가재복주귀미득)

꿈길에나 석천 서쪽엘 가려 해요 夢魂長落石泉西 (몽혼장락석천서)

 

이후 20여 년간 지방의 관기로 살았다.

46세 무렵 한양의 명사들과 교류하다 재상의 첩으로 생을 마쳐 석천정사 서쪽 어딘가에 묻혔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기칠송(奇七松)

 

적막 속에 비단 장막 드리웠네 重屛寂寂掩羅幃 (중병적적엄라위)

네 남긴 옷에 향기만 남았구나 但惜餘香在舊衣 (단석여향재구의)

평생토록 노래하며 춤추리라고 생각만 했지 自分平生歌舞樂 (자분평생가무락)

오늘처럼 이별 아픔 있을 줄이야 不知今日別離悲 (부지금일별리비)

 

설죽의 막내 동생 칠송에게 보낸 시 기칠송(奇七松)에서는 고향과 혈족을 떠나 객지에서 자유롭게 살 것이라 믿었지만  고독한 비첩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신세를 한탄하며 석천을 떠난 것을 후회하고 있읍을 느낄 수 있다. 이렇듯 설죽의 시에는 감정을 절제하고 아픔을 감내하며 인고하는 당시의 여성의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봉화성석전(奉和成石田)

 

잠령은 연하의 주인이고 蠶嶺烟霞主 (잠령연하주)

석전은 시의 주인이네 石田詩主人 (석전시주인)

서로만나 취하는 줄도 모르고 相逢不覺醉 (상봉불각취)

양화진엔 달이 지네 月墮揚花津 (월타양화진)

 

우리나라 역대 여류시인의 작품을 통산하면 대략 200여명이 2천여 수의 한시를 남겼다 한다.

그중 설죽이 166수를 남겼으니 조선조 규방문학의 대표인 허난설헌이나 기생 문학의 상징인 황진이와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여류 시인이다. 더욱이 조선시대 미천한 노비 신분으로 시문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설죽의 시는 안동 권씨 문헌 가운데 당시 유곡삼절(酉谷三絶)로 불렀던 원유(遠遊) 권상원(權尙遠)의 시문집인 『백운자시고(白雲子詩稿)』의 말미에서 발견됐다. 당시 설죽의 작품은 유명 문인들의 정평을 받았다.

 

이로하여금 봉화에서 설죽의 작품을 깨워 숨쉬게 하려는 설죽예술제가 매년 실천되고 있다. 

 

 

- 「꽃에게 말을 거는 남자」블러그에서 발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