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물/시인들 시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 허수경

김낙향 2018. 10. 19. 21:36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 허수경


                                                          

            

내일은 탈상
오늘은 고추모를 옮긴다.

홀아비 꽃대 우거진 산기슭에서
바람이 내려와
어린 모를 흔들때

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
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
아랫도리 서로 묶으며
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남녘땅 고추밭
햇빛에 몸을 말릴 적

떠난 사람 자리가 썩는다
붉은 고추가 익는다

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
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
아랫도리 서로 묶으며
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폐병쟁이 내 사내 / 허수경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이라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속 같아 내라도 턱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 오르는 물 거두어 주고 싶었네
 산가시내 되어 독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 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어디 내 사내 뿐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