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뜰/마음자리

일손을 놓고

김낙향 2019. 10. 28. 22:10

일손을 놓고

 

 

 

구름 잔잔하게 깔린 하늘을 보며 "올여름 뭉게구름도, 새털구름이 깔린 가을 하늘도 차분히 바라볼 틈이 없었네" 혼잣말을 해본다.

꽃이 예쁘게 피어도 풍경이 아름다워도 그 찰나를 즐길 마음의 여유도 없었지만 공감하며 나눌 이웃도 없다. 

다 나이 많은 어른(다리 허리가 불편한)들이고 몇몇 중년들이 있지만, 농사일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나 역시 끊임없이 이어지는 풀 뽑기와 텃밭 일에 몰두하면서 삼시 세끼 챙기며 주부가 해야 할 자질구레한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해는 저물고, 꽃은 혼자서 피고 지고, 계절도 연이어 바뀌고... 훌쩍 한 해가 지나가고.

 

오늘은 11월 초.

제대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아직 추수가 끝나지 않아 바쁘지만, 도시 사람도 농촌 사람도 아닌 어정쩡한 나는 텃밭에 자라고 있는 김장 배추뿐이다.

작년에는 이맘때 배춧속이 꽉 찼었는데 올해는 속이 차질 않아, 겉잎을 오므려 묶으면 속이 차오를까 싶어 엎드려 일일이 묵었더니, 이것도 일이라고 허리가 아파서 뜨락 의자에 앉아 쉬면서 하늘을 본다.


마음이 느긋해지니 자유분방하게 닭장을 드나드는 참새가 보인다. 귀엽다.

 

가을볕에 빠글빠글 파마한 할미꽃 잎줄기가 길게 늘어져 있고.

줄기를 길게 뻗은 국화가 노란 꽃을 와르르 피워 무겁다며 축대에 걸쳐놓았고,

카멜레온 채송화는 왕성하게 푸름을 뽐내며 꽃 몇 송이 아직 붙들고 있고,

고추잠자리 한 마리 늙은 백일홍에 앉아서 돋보기 같은 눈망울을 굴리며 나를 탐색한다. 

 

우두커니 앉아있으니 풍경이 다 고요하다.

 

일흔이 넘은 나도 노인인가 보다. 지나간 날들을 뒤적이는 것을 보니.

구순이 넘은 친정어머니도 내일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직 지난 세월을 싫증도 안 내고 거듭거듭 끄집어낸다.

배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쩔 수 없는 생리현상같이.

 

살아온 날을 곱씹어 보니 나는 나의 삶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순간순간을 모면할 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후회하면서도 찌개도 국도 아닌 삶을 간만 보다가 나이가 든 것 같다.

고단하고 힘들었던 날들을 잘 살아냈다고 자부하고 있는 나는 그 고단함을 책임감으로 착각한 미련스러움은 아니었는지... 살림을 하는 이 세상 주부들이 나와 똑같은 후회를 하면서 책임감으로 자기 삶을 찌개와 국처럼 끓이며 간을 맞춰왔기 때문에 남편들이 편하고 사회가 편하고 나라가 편한 거라고 우기며 나의 지난날을 위로해 본다.

 

어쩌면 생의 내면에 사소한 행복이 간간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삶에 속으면서도 살아내지 않았나 싶다.

어쩌다 아주 어쩌다  남편이 분리수거를 해준다거나, 빨래를 널어준다던가, 결혼기념일은 잊어도 생일은 챙기고,  라면 하나 끓일 줄 몰라도 국화빵이나 붕어빵을 사 들고 들어올 때 아주 사소한 가상함에 말랑해지는 마음, 사막 오아시스에서 목을 축이는 요 짧은 순간의 달달한 맛 때문인 것 같다.


얼마 전, 딸애가 "엄마 빵 좋아하지. 파리 바게뜨에 가서 휴대폰 보여주고 먹고 싶은 빵 고르세요." 하더군.

일흔 해를 넘게 살았지만, 휴대폰 앱으로 빵을 사 보기는 처음이다. 그리고 택배로 아들이 보내준 멜론 수박도, 사위가 꼬박꼬박 보내주는 용돈도 얼마나 귀한 행복인지.

요즘 워낙 많이 소비하는 사랑이라는 말 너무 흔해서 최면이나 미신 중간쯤이라 여기다가도, 사소한 마음도 거듭 생각하지 않으면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식빵 가운데 부분처럼 말랑해질 수밖에 없는 사랑을 먹으며 산다. 

 

이 나이까지 살면서 하고 싶은 것들을 적어본 적이 없다. 꿈이 없는 사람처럼.

버킷리스트는 젊은 사람들보다 내 나이에 더 어울리는 말이다. 더 늦기 전에 목록을 만들어 봐야겠다.

 

/어떤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와 하고 싶은 일을 작은 노트에 적었는데. 정말 사소하였다.

수영하기, 춤추기, 속옷 사기, 신문 읽기, 지하철이나 열차 타기, 빨래 널기, 시장이나 슈퍼마켓에서 느긋하게 구경하며 장보기, 같이 양치하기, 쓰레기통 비우기, 사랑하냐고 물어보기 등...

이 소소한 리스트가 사소하다 못해 시시한 일들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세계 일주나 남극을 탐험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라고.

어떤 여자에게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귀찮기까지 한 일들이 누군가에는 간절한 '로망'이 될 수 있는 거라고. 아무리 화려한 사람도 혈액의 90퍼센트가 물이듯이 인생의 90퍼센트도 별 특별한 것 없는 사소한 일상들로 채워진다/는 글을 성수선 수필가의 책에서 읽었다.

 

예전에는 물렸던 "밥 먹었니?"라는 말이 이젠 그립다.

 

매일 거듭되는 일상의 권태에 이벤트 같은 순간을 기다리기보다 소소한 것들에서 기쁨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삶이라는 글이 생각나지만, 종종 이벤트 같은 복권 같은 자극적인 날이 배달되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내 안에 있음을 숨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