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뜰/마음 안에 풍경.2
족보를 보다가
김낙향
2020. 5. 26. 21:43
족보를 보다가
계보까지 들먹일 것 없이 내가 알고 있는 조상 중에는 역적으로 몰린 정승은 고사하고 원님 하나 있었다는 말 듣지 못했다. 부잣집 머슴을 살다가 별당 아씨와 눈 맞아 멍석말이당한 조상이나 미모에 시달리다 요절한 기생이라도 족보 어디쯤 숨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내가 아는 것은 삶을 바꾸어보려고 농토를 팔아먹은 후레자식도 없고 필체는 좋아서 남의 대문에 입춘대길이나 축문, 지방 쓰는 것이 고작이라, 면서기나 이장 임명장 하나 없으며 흥이 넘치는 풍물패도 입담 좋은 만담꾼도 없다. 어쩌다 가문의 의붓자식처럼 산 대장이 되었을 때 바지랑대 같은 긴 획을 긋나 했더니만 이내 핑계도 없이 시 나부랭이를 들고 밤잠을 설치다가 창의적 묘사로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족보에 굵은 돋움체로 여식(女息) 이름 올리는 무모함을 짊어지나 했는데 시답잖은 시인이 넘쳐나는 세상에 나까지 보태면 안 될 것 같다는 망설임에 에워싸이니 시린 갈망이 구명조끼도 없이 수심(修心)에 잠긴다
素然김낙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