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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가 담을 넘을 때.. 등 / 정끝별

마중물/시인들 시

by 김낙향 2008. 4. 28.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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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가 담을 넘을 때 / 정끝별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크나큰 잠 / 정끝별 ----------- 소월시 문학대상 수상작

 

 

 

한 자리 본 것처럼

깜빡 한 여기를 놓으며

신호등에 선 목이 꽃대궁처럼 꺾일 때

사르르 눈꺼풀이 읽던 행간을 다시 읽을 때

봄을 놓고 가을을 놓고 저녁마저 놓은 채

갓 구운 빵의 벼랑으로 뛰어들곤 해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사과 냄새 따스한

소파의 속살 혹은 호밀빵의 향기

출구처럼 다른 계절과 다른 바람과 노래

매일 아침 길에서 길을 들어설 때

매일 저녁 사랑에서 사랑을 떠나보낼 때

하품도 없이 썰물 지듯

깜빡깜빡 빠져나가는 늘 오늘

깜빡 한 소식처럼

한 지금을 깜빡 놓을 때마다

한 입씩 베어먹는 저 큰 잠을 향해

얼마나 자주 둥근 입술을 벌리고만 싶은가

벼락치듯 덮치는 잠이 삶을 살게 하나니

부드러워라 두 입술이 불고 있는 아침 기적

영혼의 발끝까지 들어올리는 달콤한 숨결

내겐 늘 한 밤이 있으니

한 밤에는 저리 푹신한 늘 오늘이 있으니

 

 

 

구름시 / 정끝별

 

 

구름은 어찌 그리 미끌한지 좀체 겨울 까치집에도 터지지 않고 꼭꼭 닫아건 문지방에도 걸리지 않는다 어쩌다 저무는 해를 걸쳐입은 먹구름이 숨어들어 나를 감싸안고는 깜깜한 눈빛으로 따나곤 한다 미끈 떠나는 구름을 무심결에 밟았을 뿐인데 구름의 뿌리였을까 창밖으로 폭설의 구름이 펼쳐진다 주저앉은 구름이 떨어져내리는 물방울의 마음을 받아낸다 지시락물로 밥을 짓던 구름이 참기름 냄새를 피우며 집 한 채가 되기도 한다 구름이 걷히면 솔개나 까치가 하늘의 높이를 가늠해보기도 한다 구름을 몰고가는 것은 바람꽃이다 도둑맞은 사랑이다 쫓기는 구름을 맞아들인 어머니 달은 밤새 하늘솥에 불을 지펴 아침 부엌에서 뭉게뭉게 구름을 퍼올린다 서쪽에서 바람이 인다 흘러가는 것들의 저 술움, 눅눅한 솜이불 냄새를 풍기며 연이어 내 품에 달려오는 구름의 구름들, 구름은 멈추지 않는데, 나도 흘러내리는데, 발바닥 아래에마른 구름이 바스락, 어쩌나 저런 정든 것들,

구름을 생각할 때마다 물방울이 떨어진다
구름 아래 세상이 구름과 다르지 않다

종일 구름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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