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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마중물/시인들 시

by 김낙향 2010. 1. 24.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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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 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키 큰 남자를 보면 / 문정희

 

 

키 큰 남자를 보면

가만히 팔을 걸고 싶다

어린 남 오빠 팔에 매달리듯

그렇게 매달리고 싶다

나팔꽃이 되어도 좋을까

아니, 바람에 나부끼는

은사시나무에 올라가서

그의 눈섶을 만져 보고 싶다

아름다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눈섶에

한 개의 잎으로 매달려

푸른 하늘을 조금씩 갉아먹고 싶다

누에처럼 긴 잠 들고 싶다

키 큰 남자를 보면

 

 

 

 

아름다운 곳 / 문정희

 

 

봄이라고 해서 사실은

새로 난 것 한 가지도 없다

어디인가 깊고 먼 곳을 다녀온

모두가 낯익은 작년 것들이다

 

우리가 날마다 작고 슬픈 밥솥에다

쌀을 씻어 행구는 있는 사이

보아라, 죽어서 땅에 떨어진

저 가느다란 풀잎에

푸르고 생생한 기적이 돌아왔다

 

창백한 고목나무에도

일제히 눈펄 같은 벚꽃들이 피었다

누구의 손이 쓰다듬었을까

어디를 다녀와야 봄이 될까

나도 그곳에 한 번 다녀오고 싶다

 

 

 

즐거운 밀림의 노래

 

 

백화점마다 모피 세일을 한 후

거리에는 때아닌 짐승들이 밀려나와

소란을 떨었다.

 

빌딩 사이로 밍크가 재빨리 사라지는가 하면

지히실에는 양 한 마리가 삭간신문을 사고 있었다.

오리는 남의 이불 속까지 숨어 들었다지.

아니구 재미있어라, 심지어 악어들조차

젊은 계집애의 겨드랑이에 끼어서 이를 악물고 있었다.

뱀들은 요즘엔 주로 살찐 사내들의 허리를 노린다는군.

 

비야 오지 마라.

이 도시가 무서운 밀림이 되고 말리라.

아니 어린 여우 두 마리가 열렬히 교미를 하며

호텔문을 나서는 것을 보아라.

네거리에 멈춰선 자동차 안에도

신호등을 노려보는 낙타의 검은 눈이 있다.

주름살 수술을 하고 돌아가는 중년여자의

 목을 애무하는 살쾡이들.

쥐나 토끼도 털을 세운 채

택시를 기다리는 청년의 호주머니를

슬슬 덮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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