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갈피
안태현
골목이 잘 녹아있는 동네를
한 바퀴 돌아오면
주머니에 주일 성격학교 달란트가 들어있는 듯
얼마쯤 눈부시다
저녁 말미에는
소품 같은 감정들이 자주 핀다
나의 생계는
서가에 꽂힌 두꺼운 책 같아서
함께 기숙하고 있는 포만감을 모르고
금박을 입은 채
점집을 기웃거리며
남은 생에
기다릴만한 운세 하나쯤 더 간직하고 싶은데
그런 게 사람이다
무른 생선과 낡은 깃발과 깨진 유리창들
두 발로 옮겨야 할 이야기들은 들끓고
골목은 끝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골목이 많은 내 몸의 갈피에는
쓸모없는 후일담처럼
나도 모르게 지운 이야기가 여럿이다
저녁 무렵에 모자 달래기
모자를 쓴 모자가 징검다리를 건너간다
모텔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들의 강을 건너 머리들이 수련처럼 떠도는 찬란한 거리로
해가 사라진 저녁에도
우리는 여전히 감추어야 할 무엇이 남아 있고 어떤 정중함도 없이 만찬에 들어선다
머리에 감기던 수천 년 전의 빗소리를 너라고 부를까
모양을 바꾸려 하고
용도를 바꾸려 하고
한 끼의 그늘을 부릴 곳을 찾아 헤매는
너의 속뜻을 알지 못해
문명의 하구 같은
골목어귀에서 어묵을 먹고 돌아오는 저녁
아무도 환호하지 않는 높이에 걸린 내 머리에서도 빗소리가 들리는지 궁금하다
배고픈 수렵에서 돌아오면 멀리에 떨어지는 날짐승의 피를 훔치던 손바닥을 눈썹 위에 두고
아무 먼 파문을 새겨 읽는다
근사해, 너의 기념일이야
시집-《저녁 무렵에 모자 달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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