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참나무를 두드리는 시간 외 3편 - 강영란
굴참나무를 두드리는 시간은
이제 막 도토리를 깨우는 시간
깨어난 도토리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오는 시간
봄을 지나 여름을 건넌
따글따글한 꿈들이
종지 안에서 다르륵 몰려다니며
굴참나무를 두드리는 소리
다르륵 미세한 진동음이 종지를 두드릴 때
보인다는 다른 도토리에게 보내는 수화음의 긴 파장
귀대지 않아도 같은 영혼을 지닌 것들은
살 살 핏줄의 귀퉁이를 나눠 먹으며 서로를 부르고 있다
몇 개의 잎에서 떨어져 나온 발자국들
저녁이 오면 작은 접시 그 오목한 골짜기 안에서
캄캄 눈 어두워지고 귀만 밝아져
고막마다 가벼운 깃털들이
지난 여름의 푸른 상처 귀지를 쓸어내어
별이 마실 나가는 소리를 쟁여 놓으며
달팽이관이 평형을 회복하는 밤
드르륵 청동어 소리
도토리 속 굴참나무를 두드린다고
종지를 흔들어 대는 손에 고요한 공기를 불러들이며
별은 낮게 떠서 하늘 귀를 밟고 있다
낙타
사막 위를 걸어가는 낙타들의 행진을
텔레비전으로 본다
출렁출렁
일렁일렁 걸어간다
무리 지어서 걸어가기도 하고
커다란 너울처럼 혼자서 걸어가기도 한다
온 힘을 다해
바다 사막을 떠나는 범선
연신 노 젓는 낙타의 목
선장이 잡아 쥔 고삐가
한 번씩 당겨질 때마다
둥근 혹이 파도로 솟아난다
한때 그렇게 파도였다가 굳어진 혹들
바싹 마른 구군들이 파도의 남은 기억으로
포말을 일으키며 흰 꽃을 피운다
모래 폭풍 속에서 아슬히 보이는 등짐 꽃들
모든 등짐들은 꽃을 피우기 위해
그렇게 매달려 있다
꽃 한 송이 피우는 생의 이면에는
사막의 젖은 속눈썹이 있다
볼펜 한 자루
볼펜 한 자루 속 잉크가 다 닿도록 글을 썼지만
정작 당신에게 사랑한다 한 구절 써 보내지 못했습니다
그 볼펜 속 잉크로 일직선을 그리면 지구 한 바퀴 길이는 되지 않을까?
뜬금없이 생각해 보다가 지구 한 바퀴 다 돌도록
사랑한다 그 말 한마디 못하고 보냈음에
희미해지는 잉크의 발자국 속으로 탁본 같은 눈물이 고입니다
칼보다 더 날선 펜으로 사랑을 파고 있습니다
흰 조각도가 파내는 글자들
볼펜이 사각거리며 지나갈 때마다 당신이 건너오는 소리
무슨 간절한 전할 말이 있다는 듯
사각 거리는 소리 속으로 엷은 떨림의 진동이 입니다
잉크가 다 떨어진 펜촉이 종이에 긁히는 소리
숯 눈 밟는 소리
대나무밭 걷는 소리
그 많은 소리의 잎사귀들이 다 쓴 볼펜심
플라스틱 안에 모여 투명한 공명을 이룹니다
볼펜 한 자루
아무데나 휙 버리면
바람 한 줄기 볼펜심 안으로 들이치며 휘파람도 휘휘 불어줄 것 같은
무엇이건 파낼 수 있는
흰 조각도 하나
슬리퍼 한 짝
옆으로 뉘여 진 슬리퍼 한 짝 나갈 때 놓여있던 모습 그대로다
단단하게 굳어진 화석 같다
평생을 단 한번도 움직여 보지 않았던 것처럼
타닥타닥 그대 찾아 다녀 보지 않은 것처럼
캄캄했던 그 길을 건다가 돌부리에 채인 발에
같이 피 흘려 울어보지 않은 것처럼
완강한 모습으로 뉘여 져 있다
모든 돌아누운 어깨들은 저리 완강해서 온 몸으로 발톱을 세운다
슬리퍼 한 짝 손에 들고 보니
무슨 생각의 길로 힘을 집중 시켰는지 중심이 골똘하게 파여 있다
그 옆으로 실핏줄 같은 길들이 지도를 새기며 중심을 향해 있다
내 마음의 중심도 저렇게 파여 있었구나
옆으로 뉘여 져 쓰러지고 있었구나
슬리퍼 바닥으로 스며드는 물소리
지꺽지꺽 녹스는 소리
한 짝을 들어 다른 한 짝 옆에 놓고 보니
몸의 결을 이룬 물결무늬 신발바닥
둥글게 솟아난 눈물방울들이 패총으로 단단하다
조선일보당선작_ 신철규/ 유빙(流氷) (0) | 2011.01.24 |
---|---|
2011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나무의 문 / 김후인) (0) | 2011.01.24 |
직선의 방식 / 이만섭 (경향신문) (0) | 2010.02.09 |
폴터가이스트 / 성은주(조선일보) (0) | 2010.02.09 |
검은구두 / 김성태(한국일보) (0) | 2010.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