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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공모 당선작>현대시학

마중물/시인들 시

by 김낙향 2011. 1. 7.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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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공모 당선작>

(제8회) 2003년 10월호 : 장혜승,손창기

 

손 창 기

 

가재미


바닷가 덕장에서 흰 근육들 눈에 들어온다
중심을 세운 건조대에
물구나무 선 가재미들,
한 쪽으로 몰린 까만 눈알 굴리며
비늘 번뜩이는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햇빛 삼켜 뼈를 따뜻하게 뎁힌 것들
모기장 위에다 널어 말리는 할머니,
진한 삶의 비린내가 창구멍으로 빠져나가고
축축하고 말랑말랑한 죽음들에게서
자잘하고도 뽀얀 뼈들이 일어선다
저렇게 맑게 늙으면 속살마저 투명한가
가슴 속 시름들, 이리저리 뒤집어 본다

애증의 지느러미 잘려나가고 수북이
소쿠리에 담겨진 마른 배(腹)들 내려다보는
저 무른 가재미들

 

장판 지갑


겨울 자취방을 어머니 다녀가시면,
온기의 웅웅거림이 방바닥에서 생겨났다

나의 방에는
시꺼멓게 낡은 장판이 지갑이었다
장판 지갑은 불을 먹고 살았다
부푼 공기가 가죽의 찢어진 구멍을 꿰매고 있었다
열기를 이기지 못한, 구겨진 지폐
구들구들 향내를 풍기며 팽팽해 졌다
어쩌면 돈이 나를 냄새 맡고 있었는가

지퍼 없는 지갑을 열 때마다
제 색깔이 바랜 노란 꽃점이 피어난다

어머니 생신날, 아궁이에 불 지피며
구들목 장판 속으로 돈을 넣는다
넉넉히 드리고 싶지만 가난한 마음
그랬었구나, 어머니는
일생, 주머니 속에 장판 지갑을 가지고 계셨다

 

구름 이불


산길 가다 중앙선에 청설모 한 마리
푸른 숲에 이르지 못하고 죽어 있다
햇빛 살랑대는 꼬리털 사이로
인도 동부 아삼주의 한 다리 위
버스와 부딪힌 코끼리를 본다

이들 덮어줄 이불이 없다

푸른 하늘에선 베올에 북 지나듯
실을 잣는 제비들
공중의 베틀북으로 보풀처럼
짜여지는 纖纖한 날실들, 저 마지막 구름들

 

버선


아카시아에도 버선발이 있는가 보다.

바지랑대에 매달려 있는 꽃망울에는
발뒤꿈치가 자란다.

회한과도 같은 향기를 아그데아그데
피어 올린 제 버선이
향기로운 사향주머니였다는 것을

흰 옥양목을 앙감질로 밟듯
터질 듯한 속살이 드러난다.
한 겹, 두 겹 속버선 벗겨진 사이로
뾰족이 코끝을 내미는 실밥들,

상처 터진 자리에 봄이 돋고
이 고요의 그늘 속에
시린 발목을 내놓은

꽃들이 지그재그로 만개한 버선들을 열고
너널너널거리는 동안
지상엔 티밥만한 햇빛들이 수북이 널브러진다.
봄이 다 널브러진다.

 

담벼락의 눈


낡은 잿빛 슬레이트 지붕 아래
승차권 한 모서리가 잘려 나가듯
흙 담벼락의 한 쪽이 뚫려나가고
그 개찰구 안으로 빨래가 펄럭인다
빨랫줄에 매달린 옷들 나붓나붓
찔레꽃에 물들어 하얗게 피어난다

세월의 완행열차를 타다보면 나는
옷에 색깔을 들이고 싶을 때가 많았다
교복자율화, 하지만 제2국민역 덕택으로
교련복의 긴 소매가 사계절을 대신했다
쪼그라든 위장처럼 홀쭉했던 옷 보따리
풀어 헤쳐, 그 옷 햇빛에 널고 싶다

커다랗고 깊은 담벼락의 구멍으로
검은 구름 손사래로 치우는 빨래들
축 늘어진 바지랑대 쑥 올리는 낮달
문득 새파란 눈동자 하나
환하게 눈길을 던진다

 

 

 


십자수 뜨다 / 장혜승

덫에 걸린 물들이 눌러앉은 연못
소금쟁이들 머리 맞대고 수근수근 떠 있다
작은 기척에도 온몸 떠는 물살 앞에
허겁지겁 내려온 황소바람 못둑을 당긴다
못속 팽팽해진다

억장 무너진 삭정이 시끌시끌한 나무들 데리고
들어간다 뒤틀린 숲이 따라간다
소금쟁이들 솜털발 꽂아 십자수 뜬다
가위표 하나씩 수면에 박힐 때마다 내 몸이 따갑다
가위표 드러찬 못 속으로
먹장구름 낙관으로 내리박히자
못속 활딱 뒤집어진다

바깥 세상이 물구나무 선 채 끄떡인다
시퍼렇게 소리치고 싶은 내 몸 사방팔방으로 열려
소금쟁이들 띠줄로 진을 치고
나는 못물 한 장씩 포를 떠
갈라진 행간으로 꾸역꾸역 밀어넣는다

 

굴렁쇠


내 몸은 모두 발이다
피리소리도 신명나는 춤도 버린 나는
텅 빈 동그라미다
걸림돌 널려앉은 가파른 길
어디쯤서 끊어질지 모르는 이 길 아닌
다른 길 나는 모른다

들녘 새파란 심장 송두리째 파먹고
외발로 가는 나를 패대기치고 달아나는
너, 돌개바람

가파른 언덕 또 하나 으릉대며 다가온다
마저 끌어낸 울음으로 더 높은 벽을 쌓고
솟구치는 너를 꺾는다

나는 지금 가장 힘든 평지를 가고 있다
내 걸음에 실려오는 피리소리들
춤출 수 없는 어긋난 장단
너무 올라간 울음벽 헐고 용서 무성한
이곳에 절뚝이는 나를 감히 세우고 싶다
내 몸은 모두 무릎이다

 

탱자나무 위 메꽃


녹꽃 울창한 함석집 울타리에
서슬 퍼런 정의로 똘똘 뭉친 한 무리
하늘 향해 당당하게 섰다
─접근 금지
감히 실낱같은 넝쿨 하나
가시울타리 깡알깡알 기어올라
저런! 저런?

소나기 사태진 땅을 두드리고
천둥 터지는 소리에 일어난 하늘
눅눅한 세상을 털어 널 때 누가
찢어발기는 소리로 나팔 분다
너, 맨발로 가시넝쿨 오르던 메꽃

팽팽하던 허공이 함성으로 쪼개진다
황금덩이 좍 울타리를 둘러싼다
찢어진 입 귀에 건 햇덩이 함석지붕에 앉는다
지붕 뚫고 차오르는 갓난아이 탄생소리

 

오래 앉았던 언덕 버리고


작은 지붕이 전부인 교회 나무십자가 외롭다
열애중의 고추잠자리 스스로 못 박아 더 붉다
나는 오늘도 어제같은 누더기로
이 언덕에 앉아
벗은 십자가를 내려다 본다
서쪽으로 팔 벌린 십자가 피를 말리고 섰다
온몸 불덩이 된 고추잠자리
힘센 날갯짓으로 시퍼런 하늘 휘젓는다
하늘이 끓기 시작한다
십자가에 박혔던 구름들 뭉텅뭉텅 타오른다
나는 오래 앉았던 언덕 버리고
십자가 꼭대기로 나를 던진다
내 몸 속 깊숙이 날아든 교회당
아맨 아맨 아맨
나를 친다

 

소리, 그 소리에


중부지방 대설주의보에 놀란 영남 눈떼들 쏟아붓는다. 욕심껏 터잡은 저 오거리의 차량들 과거를 묻으며 앞으로 앞으로 밀려든다 뒷자리에서 오래 침묵하던 낡은 트럭 고래고래 매연 쏘아대며 헛바퀴 굴린다 문구점에서 달려나온 나침반 귀머거리 하늘에다 삿대질 해보지만 드세지는 묵비행렬로 난장판 된 오거리

마침, 하교길 초등학생들 시위대처럼 몰려나온다 아이들 들쳐 업은 책가방들 신호등 발자국따라 달려간다

하늘 고막 여는 필통소리
달그락 달그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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