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자|배추를 여니 나비 외 4편 • 김일곤 당선소감|시의 촛불을 환하게 밝히면 심사평|어긋남도 틀어짐도 없이 깁고 꿰매는 수행법의 詩 • 김광기 심사위원|김광기(글) 나금숙 박남희 송용구 이영식
배추를 여니 나비 외 4편
김 일 곤
아내는 배추를 열어 노랑나비, 한마당 가득 날린다
나는 철없이 나비를 타고 놀다 샛노란 문양 노랑노랑 읽다가 고향집 마당가에서 치자 꽃물들이던 누이 생각하다가 어머니의 쪽진 가르맛길 달려도 보다가 문득
뚱딴지처럼 김장배추가 되고 싶은 거다
아니, 아삭아삭한 김치로 익고 싶다
싸락눈표 소금에 절여진 나는 채반에 다소곳 누워 순명을 고한다
설폿한 날개 밑에 양념이 입혀지고 소가 박힌다
항아리 안에 어긋 나긋 누워서
폭 익으려면
옴짝달싹하지 말라고 지그시 가슴에 누름돌을 올린다 갑갑하고 돌연 서럽기도 하였으나
꾹 참아내며 그냥 한데 섞여 가라앉고 부드러워지며
숙성되기 간절히 바란다
맵고 짠 것들이 함께 어우러지며
함부로 설익지 않고 착 달라붙도록 갖은 양념에 폭 익은 나,
질항아리에서 탈출 끼니마다 나비의 날갯짓으로, 애초롬한 얼굴로, 가족들 둥근상 위에 오른다
긴긴 삼동 고구마 삶기 맞춤한 날은 내 샛노란 날갯죽지가 쭉쭉 찢어져도 좋아 가족들 손끝에서 훨훨
윤달
박음질이 선명하다
오직 앞을 향해 나아갈 뿐
뒷걸음칠 수도 옆길로 들 수 없는 바느질
깁고 꿰매는 수행법이 인생을 닮았다
사는 일도 옷 짓는 일 같아서
자식 기르는 일 날실로 삼고
세월을 씨실 삼아 한 땀 한 땀 짜 왔다
치자 빛 삼베옷 펼쳐놓고
동정과 옷섶 매만지며 왜 웃곤 하실까
연꽃 입술 초승달 눈썹 그려서
시집온 날처럼 가시려는 걸까
윤사월 햇살 좋은 툇마루에 동그마니 앉아
마름질 마친 수의,
마당가 마른 햇살에 얼비쳐보는데
살아오신 것처럼 어긋남도 틀어짐도 없다
목련꽃 피고 풍경소리 맑게 우는 날
아슥한 길 떠날 때입을 삼베옷 한 벌
회전문(回轉門) 안에서
문의 행위는 소통의 손짓이다 네 개 방으로 구성된 소통의 통로는 열림과 닫힘으로 구체화된다 회전문의 몸놀림은 호기심으로 딱 안성맞춤, 하지만 들고 보면 구속의 틀 본디 문은 자유로움과 여유롭고 싶지만 몸통이 큰 빌딩일수록 여닫이문보다 회전문을 선호한다 환대라기보다 박대 방식이다 나는 빨리 들어가고 싶은데, 느릿느릿 걷고도 싶은데 나오는 이의 보폭에 맞춰야 하고 나오는 이는 들어가는 이의 속도에 맞춰야 하는 이율배반 속이다 들어오는 사람과 손이라도 잡고 싶은데 나는 그의 등을 떠밀고 그는 내 등을 떠미는 배척의 투명한 거리가 있다 열림을 가장(假裝)한 닫힘의 혀가 날름거린다 자동회전문은 한 수 더 뜬다 박자를 놓치면 놓친 만큼 더 구속이다 은근하게 솟아오르는 이 뜨뜻한 분노, 판옵티콘의 원형구조가 통제하고 조율하는 섬뜩함이 있다 가진 이들이 열 줄 모르는 소유욕과 들어오는 사람을 자기 입맛에 맞추는 강요가 있다 문명을 굴절시키는 회전문 안에 갇혀 나는, 오늘도 어지럽다
죽비(竹扉)소리
눈을 감고 너럭바위에 앉는다
마음의 때 씻어볼까 싶다
하지만 씻기는커녕 늑골 가득 잡념이 여울진다
어찌어찌 마음의 뚜껑 열어보니
내가 지은 감옥 안에 내가 앉아 있다
눈을 번쩍 떴다 다시 감는다
제 오장육부에 간도 맞추지 못하는 놈! 죽비 내리치는 소리, 나뭇가지 흔드는 소리 첫눈으로 내린다
눈으로 마음을 씻는다
하얀빛으로 내 안의 분노도 편견도 외로움도 씻는다
목어가 꽃눈 속에 운다
적멸보궁에서 머리를 숙인다한들,
속세에서 세운 무릎 잠시 주저앉힌다한들,
저 규봉암 처마를 치고 서쪽으로 가는 몇 줄기 바람소리가 되어본들
이토록 삼매(三昧)가 어렵고
아직도 진정한 참 나를 모르겠다
바람은 주먹을 쥐고 달려와 뒤통수 후려칠 것만 같아서
눈을 뜨니 천지가 하얗다
첫눈 치고는 제법이다
구두내비게이션
장례식장에 벗어 놓은 구두는 그가 살아온 행적, 내비게이션으로 읽힌다
발이 빠져나간 구두들의 도발이라니
주야장천 코가 삐뚤어진 놈
이마에 욕구불만의 내천 자를 그린 놈
싹싹 비벼 앞이 닳아진 놈
거기에 뒤처리의 달인, 뒤 굽만 닳아진 놈까지
법(法)의 난장이다
하얀 국화 한 송이 헌화하고 돌아서는데
어느 구두 귀엣말이 흘러나온다
나의 행복한 삶을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한 고속기관차가 남의 여유와 느린 발걸음 빼앗은 폭력기관차, 타인의 참살이 막는다는 걸 왜 모를까 불의도 불법도 마다하지 않고 꺾고 꺾이는 마음의 현장, 깊은 어둠 쪽으로 목이 꺾이는 저 관성 어쩌나
힘에 대한 구두의 관심이진행방향의 경로탐색을 다 마쳤는지 긴장을 팽팽히 잡아당기고 있는 부의함 속으로 뚝! 비문의 봉투 하나 틈새를 비집는다저 탐욕의 응답 크기, 지금은 상 위에 놓인 동일한 메뉴이겠지만휘두를 몸통 크기가 수상하다 낮술에 취한 구두 하나 너부러져 있다
[ 당선소감 ]
시의 촛불을 환하게 밝히면
문학은 나를 초대하여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주었습니다. 시를 통해 나를 보고, 내면의 소리를 전달하고, 거기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삶의 경험과 생각에 시의 옷을 입히는 노력을 해왔었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그 발목을 잡아 전전긍긍했는지 모릅니다. 그런 끝에 중앙 시단에서의 재 등단 소식은 어두운 밤길 한 줄기 빛이 되었습니다. 이제 나의 시는 사람냄새 나는 곳을 찾아 나서고 싶습니다. 그래서 삶 속에서 유효하게 가동되는 진실을, 소소한 일상의 단면을 온 것으로 담아내고 사소하다고 지나쳐 버린 것들도 따뜻하게 보듬어 주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혹 누군가에게 티끌만한 위안이 되고 조그만 연못의 파문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시인’이라는 단어가 낯설고 무겁지만 그 호칭에 누가 가지 않도록 시의 촛불을 밝히는데 조금은 더 치열하게 생각하며 진정성 있는 좋은 시를 쓰겠습니다. 시인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내가 생각한 것들을 정확하고 힘 있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시 마을’과 시의 끈을 놓지 않게 격려해 주신 지인들과도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김일곤 제12회 공무원문예대전, 시 부문 우수상(행안부장관상)수상. 광주시문인협회원, 전남문인협회원,
서석문학회원, 대한불교문인협회원. 이메일 kjbst-15@hanmail.net 010-8101-6925
제 8회 시산맥 신인상|심사평
어긋남도 틀어짐도 없이 깁고 꿰매는 수행법의 詩
요즘 시단의 현상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대부분의 작품들이 산문시의 형태로 응모되었다. 서정시처럼 행갈이가 되어 있는 대부분의 작품들도 시의 문장이나 플롯들이 산문시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서정이 부재한 이미지나 플롯들이 시적 긴장감과 시적 반추의 미학적 특성을 잘 드러내주는 듯도 했으나 어쩐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쪽의 방향성을 갖는 문제가 심각한 상황인 듯도 하였다. 그중에서 김일곤, 박광석, 박정우, 신정순, 원춘옥의 응모작들이 각기 개성이 있고 작품수준 또한 고르고 탁월해 보였다. 그래서 이들의 작품을 최종본심에 올려 심사위원들은 중론을 모으다가 김일곤, 박광석, 박정우의 작품으로 대상을 좁혀 다시 논의를 하기 시작하였다. 김일곤의 「배추를 여니 나비」에서는 장자의 호접몽을 연상하게 하는 노랑나비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날아다니며 노닐다가 순명을 고하는 사물(김장김치)이 되고자 한다. 지그시 가슴에 누름돌을 올린 숙성된 삶이 되고자 하며, 가족의 둥근상 위에 올려지기를 바라는 소박하면서도 분골쇄신의 헌신적 사랑이 잘 구현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텍스트가 결연하지 않고 해학적인 묘미를 더한 그 심정의 형상성이 돋보인 작품이었다. 이러한 의미를 갖는 텍스트는 「윤달」에서 새로운 시각(視角)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화자의 어머니가 윤달에 수의를 짓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 당신이 입을 수의를 짓는다는 생각만 해도 화자는 울컥해지는데 정작 당사자는 삶과 죽음을 초월한 듯하였다. 어긋남도 틀어짐도 없이 깁고 꿰매는 수행법과 삼베옷 수의에 연꽃 입술과 초승달까지 그리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잔잔하게 텍스트와 그 행간에 비친다. 또 「회전문」에서는 판옵티콘(Panopticon)의 원형(圓形)구조로 회전문을 대상으로 삼으며 통제하고 조율하는 섬뜩한 문명의 구조를 하나의 낯선 물질적 대상에 포착하여 풀어내기도 한다. 가볍게 지나치는 구조지만 시인이 제시하는 대상적 의미에 집중하다보니 생각만으로도 답답하고 어지러운 물건이 되었다. 이렇게 새로운 의미를 제시하는 김일곤의 창의적 발상이 그의 작품 곳곳에서 빛이 났다. 박광석의 「말티즈와 아내」 등의 작품은 재미도 있고 일상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의미들이 신선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치환적인 요소나 의미가 한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일상적인 것에서 작품을 구상하면서도 참신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것이 또 상대적인 결함으로 부각되는 것이다.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듬는 시적 텍스트의 밀도를 기대하게 하는 작품들이었다. 또 박정우의 「달빛 살인 1」과 「달빛 살인 2」의 연작은 시적 분위기가 묘했지만 나름대로 신선하고 긴장감을 갖게 한 작품이었다. 묘사와 진술이 적절하게 잘 진행되어 안정감도 있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구현하고자하는 시적의미를 연작으로 구성하기보다는 하나의 작품에 집중시키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었다. 작품성이 좋아 보이는 대부분의 연작들도 마찬가지였다. 연작은 연작 나름대로의 시적의미나 그 가치가 충분하기는 하지만 응모작으로는 아무래도 단편적인 작품이 좋지 않았겠느냐는 중론이었다. 작품 전반에서 보이는 박광석, 박정우의 신선한 감각과 가능성, 그리고 완성도가 높고 원숙한 경지를 보이는 김일곤의 작품을 놓고 가능성이냐 완성도냐를 논의하는 심사위원들의 설전이 뜨거웠다. 하지만 가능성을 높이 산 작품들은 호불호가 분명했고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은 심사위원들의 고른 지지를 받아 결국 김일곤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내기로 합의하였다.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경합을 벌인 박광석, 박정우 님의 문운과 건투를 빌며 당선자인 김일곤 시인께 축하의 말씀을 전한다.
심사위원 : 김광기(글) 나금숙 박남희 송용구 이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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