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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시인광장 선정 / 다시 읽는 좋은 시

마중물/시인들 시

by 김낙향 2014. 7. 5.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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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들

 

 

 

     김원경   

 

 

 죽은 자작나무에서 버섯이 자라는 걸 본 적이 있다

 

  죽은 사람이 마지막까지 남기고 싶은 말이 있어

 

  손톱을 기르는 것처럼  

 

 

  육체가 조금씩 액체가 되고 수증기가 되고

 

  말을 잃고 미세하게 돋아나는 불안을 얘기하자

 

  나는 간신히 침묵이 떨어지는 순간을 본다  

 

 

  나의 이 불안이 누군가 죽음 이후에 심어 놓은

 

  미세한 균사체가 아닐까 의심될 즈음

 

  나는 자꾸만 투명한 내장을 꺼내서

 

  최후의 수분까지 증발시키려는 순간과 악수한다  

 

 

  왜일까 왜 그래야만 할까를 생각할 때

 

  이미 난 온몸이 간지럽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건

 

  세수할 때마다 떨어뜨린 긴 속눈썹

 

  파르르 떨고 있는 한 줄 현(絃) 위에서

 

  발목을 잃은 무용수의 창백한 울음소리  

 

 

  때론 침묵이 너무 진지해

 

  게바라의 별은 어느 날 전광판에서 더 빛나고 있다지만

 

  바람 불지 않아도 바람개비는 계속 돌고 있다  

 

 

  점점이 떨어지는 눈처럼

 

  서로 다른 속도로 흩날리며 다가와

 

  읽혀지는 순간 머나먼 곳으로 사라지는 침묵들  

 

 

  침묵은 보호색을 가지고 있어

 

  수천 개의 긴 문장을 투명한 액체로 쓰고 있다

 

  나는 이 한 문장을 해독하는 데 한 생을 다 보내고 있다

 

 

 

 웹진 『문장』 2011년 11월호 발표

 

 

 

   사물 A와 B

              송재학

 

 까마귀가 울지만 내가 울음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내 몸 속의 날 것이 불평하며 오장육부를 이리저리 헤집다가 까마귀의 희로애락을 흉내내는 것이다 까마귀를 닮은 동백숲도 내 몸 속에 몇 백평 쯤 널렸다까마귀 무리가 바닷바람을 피해 붉은 은신처를 찾았다면

 

  개울이 흘러 물소리가 들리는게 아니다 내 몸에는 한 없이 개울이 있다 몸이라는 지상의 슬픔이 먼저 눈물 글성이며 몸 밖의 물소리와 합쳐지면서, 끊어지기 위해 팽팽해진 소리가 내 귀에 들어와 내 안의 모든 개울과 함께 머리부터 으깨어지며 드잡이질을 나누다가 급기야 포말로 부서지는 것이 콸콸콸 개울물 소리이다 몸속의 천 개쯤 되는 개울의 경사가 급할수록 신열 같은 소리가 드높아지고 안개사정거리는 좁아진다 개울물 소리를 한번도 보거나 들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개울은 필사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격월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10년 3~4월호 발표
  
 

본인은 죽었으므로 우편물을 받을

 없습니다

                   김기택

 

  죽은 지 여러 날 지난 그의 집으로

  청구서가 온다 책이 온다 전화가 온다

  지금은 죽었으므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삐 소리가 나면 메시지를 남겨주세요

  반송되지 않는다
  눈 없고 발 없는 우편물들이
  바퀴로 발을 만들고 우편번호로 눈을 만들어 정확하게 달려온다
  받을 사람 없다고 말할 입이 없어서
  그냥 쌓인다 누군가가 뜯어봐 주기를 죽도록 기다리면서
  무작정 쌓이기만 한다

  말을 사정(射精)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혀들은
  발육이 잘된 성욕을 참을 수 없어 꾸역꾸역 백지를 채우고
  종이들은 제지공장에서 생산되자마자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은 책이 된다 서류양식이 된다
  백골징포(白骨徵布)를 징수하던 조직적인 끈기가 글자들을 실어나른다

  아무리 많이 쌓여도 반송할 줄 모르는
  바보 햇빛과 바보 바람이
  한가롭게 우편물 위를 어정거리고 있다

 

격월간 『유심』2009년 1~2월호 발표

 

 

 거미

          이면우

 오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줄

  아침 이슬 반짝하니 거기 있음을 알겠다
  허리 굽혀 갔다, 되짚어 오다 고추잠자리
  망에 걸려 파닥이는 걸 보았다
  작은 삶 하나, 거미줄로 숲 전체를 흔들고 있다
  함께 흔들리며 거미는 자신의 때를 엿보고 있다
  순간 땀 식은 등 아프도록 시리다

  그래, 내가 열아홉이라면 저 투명한 날개를
  망에서 떼어 내 바람 속으로 되돌릴 수 있겠지
  적어도 스물아홉, 서른아홉이라면 짐짓
  몸 전체로 망을 밀고 가도 좋을 게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마흔아홉
  홀로 망을 짜던 거미의 마음을 엿볼 나이
  지금 흔들리는 건 가을 거미의 외로움임을 안다
  캄캄한 뱃속, 들끓는 열망을 바로 지금, 부신 햇살 속에
  저토록 살아 꿈틀대는 걸로 바꿔 놓고자
  밤을 지새운 거미, 필사의 그물짜기를 나는 안다
  이제 곧 겨울이 잇대 올 것이다

  이윽고 파닥거림 뜸해지고
  그쯤에서 거미는 궁리를 마쳤던가
  슬슬 잠자리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 굽혀, 거미줄 아래 오솔길 따라
  채 해결 안 된 사람의 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2002년 제2회 노작문학상 수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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