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의 결
조창환
연꽃 벌어지기 전 이른 아침
연잎에 맺힌 물방울 탱글탱글하다
저 맑고 단단한 적막의 흔적 안에는
고요의 결을 쓰다듬던 별빛의
온유溫柔와 수치羞恥가 스며 있다
작은 새의 날갯짓이 스치고 지나간
허공, 파르르 떨리는 연 밭의 혼
어떤 떨림은 잘 쓰다듬으면
이토록 매끄러운 고요가 되는구나
숨 막히도록 은밀한 교감을 나눈
황홀한 눈빛과 속살과 혀의 어둠
고독과 적막 안에 깃든 수줍은 울음
해독할 수 없는 지상의 빛을 품고
중력을 따라 미끄러지는 고요의 결에
신비로운 기품이 스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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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
박지영
화장을 하고 정장에 하이힐 신고
너는 모자까지 눌러 쓰고 불쑥 나타나
머리에서 목으로 명치끝으로
아랫배를 타고 허벅지를 더듬어 종아리로
담 결린 듯 온몸을 떠돌아다녀
너의 뿌리는 진열장에 놓여
결코 제 속을 내 보이지 않지
그 끝이 어디인지
생의 밑바닥에 새파랗게 질린 슬픔들이
그물 스타킹처럼 배배 꼬여있어서
끝내 제 얼굴을 보여주지 않거든
그렇게 수많은 밤 혼자서
저를 위한 상복을 껴입고 흐느껴 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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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종 이후 (외 1편)
김진희
씨앗을 파종한 날부터
땅속 씨앗은 당분간 청소만 하고 지내겠지
흙과의 교감이 필요하기 때문이지
곧 이��들과 인사를 나누며 통성명을 하기도 하겠지
새벽시장의 풍경들처럼 모닥불도 피우고
커피도 한 잔씩 권하기도 하겠지
몸을 데우고 마음을 데우겠지
입주 시기가 비슷한 씨앗들의 마을에선
부녀회장도 뽑고 입주자 대표도 뽑고
관리소장도 초빙하겠지
수위 아저씨들도 곧 보초를 서시겠지
집들이 방문객들도 다녀가겠지
생활이 안정이 되는 대로
그곳에서 뿌리를 박고 살아가자고 결심을 하게 되겠지
그리고 주소도 익히고 교통편도 알아보며
세상 밖으로 조심스럽게 나가도 보겠지
삐죽삐죽 본색을 드러내며
옥수수, 감자, 콩, 상추, 아욱들로 살아가게 되겠지
사람들이 윤씨, 공씨, 송씨, 황씨, 방씨 등등으로
삶을 살아가게 되듯이
그들도 그렇게 살아가게 되겠지
고슴도치
상처는 제일 아픈 곳으로 파고든다지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가
보이는 상처보다 더 깊고 위험하다지
가시를 품고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살아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는 것
가시가 삐져나오는 만큼
마음 밖은 무너져 내리는 일임을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어도 알고 있지
몸속에 품었던 가시가
조금씩 자라고 자라
몸 바깥에 경계를 세우기까지
가시 끝에 눈을 달고 살아야 했지
그것이 세상에 대응하는 방식
그것이 상처에 대응하는 방식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시오
더 이상 흔들어대지 마시오
그냥 내버려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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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시푸른저녁나방
권규미
달을 한 마리 열대어라 믿는 나라가 ���었다 모래바람 흩뿌리는 별들을 걸어와 마른 뼛조각 흔드는 나무들이 자랐다
'푸른'이란 어느 적막의 다정한 허사(虛辭)였다 실패한 마술사의 생생한 수염이 빗방울에 매달려 동그란 시간의 발을 생각했다 고삐에 매인 염소처럼 밤은 자꾸만 되돌아왔다
그게 무슨 역이었는지 모르겠다 끝없이 갈라지는 길 위로 하염없이 물을 긷는 소녀가 있었다 찬물 한 모금,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이었다
각시푸른저녁나방이 날개를 접고 제 가슴 안쪽의 어둠을 들여다보고 있다
푸나무 한 짐의 아버지처럼, 슬하의 가난을 끌고 주춤주춤 기척도 없이 안개는 차고 상한 모서리마다 수런수런 날개가 돋았다
한때 나는 추운 나라의 나방이었다 때때로, 한기(寒氣)처럼 쏟아지는 저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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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안쪽
권현형
비의 안쪽엔 공장과 사다리와
보라색 낙서와
병아리 눈물자국과
특별한 날에만 입는 원피스와 오래된 신의 눈동자와
비에 젖은 기차 바퀴 소리와
비에 젖은 재즈 디바 박성연의 목소리와
우리는 기꺼이 자신의 폐허를 젖은 안쪽을 끌어안는다
두 개는 녹슬고 한 개는 녹이 햇살 한 줌만큼
벗겨져 빛나는 꿈을
칼에 대한 정신분석이라고 해야 할지
햇빛에 대한 정신분석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척
부활절에 일자리를 잃고도
맛본 적 없는 달콤한 입맞춤을 꿈꾼다
생일 전야에 일자리를 잃고도
맛본 적 없는 달콤한 입맞춤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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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랑에서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 김소월 〈개여울〉
신해욱
이쪽을 등지고검은 머리가 도랑에 쪼그려 앉아 있습니다.
산발입니다.
죽은 생각을 물에 개어경단을 빚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동그랗고 작고 가차 없는 것들.
차갑고말랑말랑하고당돌한 것들.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계피가루 콩가 루 비듬가루뇌하수체가루 녹두가루알록달록한 고물이 담긴 쟁반을 받쳐 들고 있습니다.
— 나눠 먹읍시다.
바람이 붑니다.
검은 머리는 뒤를 돌아보지 못합니다. 검은 머리만 어깨 너머로 흘러내립니다. 이크, 몇 오라기가 경단에 섞였는지도 모릅니다.
쟁반을 몰래 내려놓고머리를 땋아주는 일이 먼저인 것 같습니다.
검은 머리가 삼손의 백발이 될 때까지백발마녀가 라푼젤로 환생할 때까지그 다음엔그 다음엔 꼭 나눠 먹읍시다.
어제의 네가오늘을 차지하고 있어서오늘의 나는이렇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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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브레멘으로 가는 거야
허수경
우리 브레멘으로 가는 거야
죽음을 당하기 전에
브레멘으로 가면 뭐가 있을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곳에 가면 음악대에 들어갈 수는 있다고
늙은 나귀가 말했지
브레멘이라고 들어봤어?
그곳은 어디에 있나?
그곳이 있기나 하나?
더 이상 죽음 없이 견딜 수 있는 흰 시간은 오지 못할걸
이 세계에서 가장 빛이 많은 곳에
가장 차가운 햇빛은 떨어지고
죽음보다 조금은 나은 일들이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네
우리 브레멘으로 가는 거야
이 세계에는 없는 곳으로 가는 거야
나귀와 개, 고양이와 수탉이 되어
주야장천 붉은 음악에 몸을 흔들면서
없는 곳을 찾아가는 여행을 하다가
도둑의 집 그 심장 속에서
음악을 허겁지겁 집어 먹으며
물어보는 거야
아니, 브레멘이라느 곳은 도대체
있는 거요, 없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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뺨에 관한 보고서
정재분
한때 얼굴의 엉덩이였던,
볼은 마음의 국물을 담는 그릇
당신의 뺨이 내게 말했어
가까이 다가오라고
때로는 기다리라고
뺨의 건반이 빠르게 출렁거렸어
애꿎은 뺨의 내력을 생각하다
선 채로 얼어버렸어
당신의 뺨이 건반을 두드리네
주로 반음을 선호하는 당신이,
좋아하는 코드는 포유류의 우음
깎아지른 벼랑의 턱수염 아래로 흐르는
단조의 음계,
순도가 약한 고독이
해석을 미루고 있지
일기예보를 살피듯,
당신의 양 볼을 주시하곤 했어
아침 안개가 풀리면 먼 산의 능선이 드러나겠지
한낮은 자외선이 강할 테고
뺨의 발설이란 뼘으로 재는 것과 매한가지
창호 문에 얼비치는 그림자 같은
오차 범위는 그날의 날씨
우산을 챙겨 넣는 편이 낫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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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부짖는 서정
송찬호
한밤중 그들이 들이닥쳐
울부짖는 서정을 끌고
밤안개 술렁이는
벌판으로 갔다
그들은 다짜고짜 그에게
시의 구덩이를 파라고 했다
멀리서 사나운 개들이
퉁구스어로 짖어대는 국경의 밤이었다
전에도 그는 국경을 넘다
밀입국자로 잡힌 적 있었다
처형을 기다리며
흰 바람벽에 세워져 있는 걸 보고
이게 서정의 끝이라 생각했는데
용케도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이번에는 아예 파묻어버리려는 것 같았다
나무 속에서도
벽 너머에서도
감자자루 속에서도 죽지 않고
이곳으로 넘어와
끊임없 이 초록으로 중얼거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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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봄은 가는 봄
장석주
모란과 작약 꽃이 지고
버드나무는 초록 물이 오른다.
푸른 뱀 열 마리가
돌 틈에서 나오고
제비 삼십 마리가
북쪽 하늘에 난다.
오는 봄은 가는 봄,
차라리 북풍 불 때가 봄이었다.
마음이 간절했으니
봄은 겨울의 백일몽,
가는 봄이
오는 봄이라고
봄 버드나무 가지의 잎은
가을의 지는 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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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보호구역 (외 3편)
하 린
배고픈 한 마리의 늑대가 밤을 물어뜯는다
고결(高潔)은 그런 극한에서 온다
야성을 숨기기엔 밤의 살이 너무 질기다
그러니 모든 혁명은 내 안에 있는 거다
누가 나를 길들이려 하는가
누가 나를 해석하려 하는가
발톱으로 새긴 문장이 하염없이 운다
부르다 만 노래가 대초원을 달리고
달이 슬픈 가계(家系)를 읽고 또 읽는다
그러니 미완으로 치닫는 나는 한 마리의 성난 야사(野史)다
서민생존헌장*
나는 자본주의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서민으로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가난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신용불량자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약소국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생존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출근과 튼튼한 육체로,
저임금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출신을 계산하여 ,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기초수급자의 힘과 월세의 정신을 기른다.
번영과 질서를 앞세우며 일당과 시급을 숭상하고,
비정규직과 아르바이트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헝그리 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대기업이 발전하며,
부유층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지름길임을 깨달아,
하청에 하청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스스로 잔업 전선에 참여하고 월차를 반납하는 정신을 드높인다.
부자를 위한 투철한 시다바리 따까리가 우리의 삶의 방식이며,
자유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가난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서민으로서,
조상의 궁핍을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빈민을 창조하자.
———
* 1968년에 선포된 「국민교육헌장」패러디.
개에 대한 예의
나의 의식이 잡종으로 기운다
목적을 발설하지 않는 이빨이 되기 위해
당신을 향해 흔드는 꼬리를 내려놓는다
예이요 새끼, 예이요 새끼새끼, 예이요 개, 개 새끼새끼
시도 때도 없이 미친 달이 비트박스를 날린다
불면증 걸린 늑대가 발톱을 세울 수조차 없는 밤
심장을 복제하려는 자 누구인가
치욕을 나누느라 왈왈왈 짖어 댄다
술 취한 어린 개 앞에서 무릎을 꿇는 건
순전히 찌그러진 밥그릇 때문
도시에겐 도시의 목줄이 필요하다
침을 질질 흘리지 않는 건
얻어맞는 밤의 아가리가 얼얼하기 때문
위악적으로 돌아설 땐 욕이 필요하다
예이요 새끼, 예이요 새끼새끼, 예이요 개, 개 새끼새끼
새점
이야기를 발설한 죄로 독방에 갇힌다
단단한 주둥이가 형벌로 점을 치고 주술이 역하게 삭아간다
당신의 운명이 무작위로 선택되고
한 줄도 못 채운 문장으로 뒤집힐 때
퇴화된 부리가 아무렇지 않게 이별을 통보한다
없는 소문이 등을 돌리는 순간
사랑했던 여자가 무녀가 되었단 걸 나이 사십에 듣는다
지나간 것은 예감이고 지나갈 것은 착각이다
깃털 하나에 사랑과 죽음이 정의되니
당신은 당신의 전생을 옛날처럼 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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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목을 끌어안고
이은규
모든 고백은 선언이다
나는 안장에 앉아 고삐를 쥔 자가 아니어라
가차 없이 채찍을 휘두르는 자도 아니어라
노래는 말이 아니어라
마부의 채찍질에도 꼼짝하지 않는
말의 목을 끌어안고 흐느꼈다는 한 사람
세상이 수근거린다 지혜를 사랑하다니, 미치광이
그가 오래 흐느낀 이유는
동물의 말을 알아들어서가 아니다
세상의 말에 귀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책상에 앉아 펜을 쥔 자가 아니어라, 나는
향기로운 문장을 휘두르는 자도 아니어라
말은 노래가 아니어라
나는 누군가 늦췄다 당겼다 하는 고삐에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어리석은 발자국
누군가 함부로 휘두르는 채찍에
고개 숙여 히잉- 먼 소리를 내는 목울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그러나 나는 이 은유를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고삐를 움켜쥔 손아귀의 힘을 상상하며
채찍을 다루는 손목의 습관을 증오하며
말보다는 노래에 노래보다는 말에
그보다 행간 사이를 서성이는 동안
초록이 진다 한들, 온다 한들 한 점 꽃이
그러나 나는 이 은유를 끝까지 밀고 나갈 것이다
오래 미치광이라 불리는 사람과 같이
가까스로 초록을 지키는 식물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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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온을 나눠주세요
김사이
해가 꺼지지 않은 밖에서
어둠이 잠을 자는 곳으로 들어와도
어디선가 시시때때로 쇠 치는 소리가 난다
말랑말랑 피가 도는 몸에 깡통이 생겼다
깡통이 커질수록 말랑하던 나는
황폐한 허허벌판으로 변해 가고 있다
찍소리 안 하는 건 적당한 비타협이라고
사랑을 버리는 것이 잘사는 법이라고
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야 산다고
살기 위해 지은 죄는 죄가 아니라고*
깡통이 끊임없이 주문을 건다
차라리 깡통 안에서라면
살아가는 데 안전할까
자유를 팔면 밥을 살 수 있는지
노란 나비에게 물어나 볼까
내 안의 깡통과 피터지게 싸운들
권력은 세상을 잘근잘근 씹어 먹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깡통과 싸우는데도
홀로 죽어가는 거짓말 같은 새빨간 진실
그대의 체온은 아직 따뜻하신가?
* 영화 <손님>에서 악행을 저지른 마을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촌장의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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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일기*
김중일
잠든 사이 지구상에서 또 몇 명이나 떠났을까.
내 가슴으로 뛰어드는 아파트 이십층의 공중.
공중에서 날개를 베고 잠든 새처럼 밤을 보내고
오늘로 뛰어들어, 뚜벅뚜벅 걷고 있는데
눈앞에 파지처럼 공중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한쪽이 뾰족하게 불거지다가 옷이 툭 터지듯
공중에 구멍이 뚫렸다.
공기가 실오라기처럼 풀리며 바람이 불고
산들바람 사이로 나뭇가지가 펜촉처럼 불거지고
붉은 낙엽들이 줄줄 새나왔다.
계절이 바뀌고 잉크가 다 마르도록
나뭇가지는 내 이름을 공중에 썼다.
백지처럼 바스락거리는 환절기 공기 위에
풍경에 도배된 바람 한 장 위에
천천히 망설임 없이 내 이름을 썼다.
그리고 일기장의 마지막 문장에 찍힌 구두점처럼
멀어지는 작고 까만 뒤통수.
날 위해 기도하는 말더듬이 우주인.
내 몸은, 지구를 관람하다가 그만 어쩔 도리 없이
슬픔에 잠긴 우주인이 쓴 일기장.
표지처럼 내 몸을 감싼 공기를 오늘 나는 만진다.
내 살갗과 옷 사이의 얇고 엷은 공기를.
내가 일생 입고 있는 공기를.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옆 사람과 돌려 입고 돌려 읽은 공기를.
살갗과 옷 사이의 공기를 우리는 알몸으로 만진다.
자식 잃고 부모 잃고 울고 있는 몸의 리듬으로 만진다.
살갗과 옷 사이로 온종일 흐르는 울음으로 만진다.
지금도 몸과 옷 사이
첨단의 얇은 공기층을 나는 껴입고 있다.
공기층 속에는 구름과 같이 건조된
빙하 같은 우주선이 있다.
나를 나의 우주로 되돌려 보내줄 우주선.
대대손손 물�� 입고 물려 읽고 간다.
말줄임표로 가득찬 말풍선을 배기구로 뿜어내며 간다.
————
* 롤랑 바르트,『애도일기 Journal de deuil』제목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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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두건의 뱃속에 잠들어 배고픈 늑대의 꿈 (외 1편)
김청우
오늘 : 비,
실없는 너의 배를 가르고 흘러내리는 날이었으리니
나는 1인극 속의 이명을 잡기 위해 장막을 설치한 자
그 소리를 엄마 모르게 품에 넣은 채 잠든 내 텅 빈 배
오늘 : 非
지금껏 거짓말로 만든 가위를 넣고 봉합했던
너의 텅 빈 배를 가르고 가위 꺼낸 날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 : 緋,
너의 불안을 알까, 붉은 불안, 붉은
해변이 너의 눈에 노을을 주입했던 날
그래서 오늘의 노을을 가져와 구멍에 넣는다, 네 배처럼 부푼 뇌에
노을은 열쇠처럼 맞아 네 눈 위에 기억을 재생하나
너와 나는 마주치는 동공에서 부정 당한다, 단지
멀리서 앓는 물소리의 욕망이
모서리의 두 귀로 생겨나는 날이기 때문에, 해변과 해변이 만나
두 개의 귀로 증명되는 너에게 부딪히는 오줌 소리,
그것이 우리의 전부라고 말한다면 또 무엇을
속이는 일이 될까, 그러나 그 경우
붉음은 알리바이를 가진다고
대본으로 읽는 목소리, 그리고 암전
어제 : 誹,
바야흐로 입천장의 알리바이가 성립되던 날
고생대의 피와 근대의 기차를 증명하는 입천장의 주름이
그 가벼운 알리바이 속에서 비로 입을 벌리지
어제 비로소 속이 보이던 입은 천장과 바닥이 평평해서
뒤집어도 입, 뒤집어도 입
이제는 사위어 가는 전등의 시간, 붉은 ��간표를 머리에 쓰고
붉은 잠에 겨운 너는 세 개의 기차역을 지난다
색을 잃은 눈빛이 그냥 지나가지 않게 말야
이미 꺾여버린 골목 역이 생겼고
현과 현 사이에서 검은 증기와 타버린 현기증을 나르는 기타 역이 생겼고
부패의 사실보다 먼저 와 부딪혀
뛰지 않는 심장을 달리는 악취 역이 생겼다지
그것은 맥베스 역의 세 마녀 역보다 악랄하지도
하지만 더 악랄하지도
악랄하지 않은 것도 아닌 알리바이였는데
그래서 도로 한복판의 차선은 개복開腹선처럼 이어졌대
그걸 본 난 다시 가짜 가위를 네 텅 빈 배에 넣은 채
지금까지 지나온 공복空腹으로 잠든다지
그렇게 너와 나는 사적私的인 공범이 되고
끓는 뼈
그가 뼈 하나를 주고 갔다고 생각했다
뼈가 구부러져 이름이 되는 건 아직 해가 지지 않을 때다
뼈가 조각나 상징이 되는 것은 아직 해가 뜨지 않을 때다
'뾰'로, 혹은 '쀼'로 뼈가 일어서는 것도
그녀가 뼈에 목걸이를 매어 줄 때다
여러 밤이 지나고 뼈는 아직 자라고 있다
그녀는 뼈해장국에 사골국, 가끔 발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지만
착실히 뼈감자탕도 해 먹었다
뼈는 뼈를 낳았고
그녀는 작은 뼈를 가슴에 심어 물을 주었다
울고 우리고 우려서 열대 우림이 되어 심히 우려했지만
국물이 나지 않는 뼈는 플루트를 불었기에
문제는 없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구멍에 바람이 들어왔다
그리고 물이 차올랐다
사이사이에 녹슨 입술이 차오르고 내려가지 않았다
삑, 삐걱삐걱 소리가 저 아래로 내려갔다
그래서 지금도 입술 위��는 물 먹는 나무 한 그루
그저 돌아가라는 말만을 반복할 뿐
좌우는 쉽게 오므려지지 않았다
수렴 없는 바람이 불자
지느러미처럼 움직이는 입술이 술술
가지를 뻗었다, 그리고 소풍이 끝나는 석양을 산포했다
그녀는 목구멍으로 술술 받아 넘겼다
소식을 들은 그는 편지로 돌을 만들어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 살짝 놓고 갔다
암각화에 계통도가 새겨지고 그녀는 나트륨을 과다하게 섭취하는 밤
암염巖鹽 같은 밤, 담석이
온종일 그녀의 달팽이관을 돌아다니는 밤
도르륵, 도륵도륵
지구 위 모든 것이 뱅글뱅글 돌았던 이유로 조용했다
뼈는 오늘도 냄비 속에서 소용돌이처럼 소용없이 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