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을 묻다 / 김형수
이천여 년 전에 방가지똥 씨앗이
스스로 발아가 된 적이 있다고 한다
한 해밖에 못 사는 풀이 때를 기다린 것이다
사랑할 만한 세상이 오지 않아
이천 년 동안 눈 감은 태연함이라니
고작 일 년 살자고 이천 년을 깜깜 세상 잠잤다니
그런 일이 어찌 꽃만의 일이랴
우리도 한 쳔 년쯤 자다가
살고 싶은 세상이 왔을 때 눈 뜨면 어떨까
사람이 세상을 가려 올 수 없으니
땅에 엎드린 바랭이들 한 쳔 년쯤 작정하고
나무를 묻었다는 매향(埋香)의 기록
아, 어느 어진 왕이 천 녕을 도모했던가
침향이 되면 누구라도 꺼내 아름다운 향기로 살라고
백 년도 아닌 천 년을 걸어 나무를 묻었단다
그것은 사람이 땅에 심은 방가지똥이었다
한 해 지어 한 해 먹던 풀들이
천 년 후의 나무 씨를 뿌렸다는
우리 오천 년 역사에서 가장 뿌듯한 매향에 관한 몇 줄의 글
읽고 또 읽고
노오란 꽃을 든 미륵이 눈에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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