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바스에서 / 박정은
왖지껄함이 사라졌다 아이는 다 컸고 태어나는 아이도 없다 어느 크레바스에 빠졌길래 이다지도 조용한 것일까 제 몸을 깍아 우는 빙하 탓에 크레바스는 더욱 깊어진다 햇빛은 얇게 저며져 얼음 안에 갇혀 있다 햇빛은 수인(囚人)처럼 두 손으로 얼음벽을 친다 내 작은 방 위로 녹은 빙하물이 쏟아진다
꽁꽁 언 두 개의 대륙 사이를 건너다 미끄러졌다 실패한 탐험가가 얼어붙어 있는 곳 침묵은 소리를 금속 냉동시키면서 낙하한다 어디에서도 침묵의 얼룩을 찾을 수 없는 실종상태가 지속된다 음소거를 하고 남극 다큐멘타리를 볼 때처럼 내레이션이 없어서 자유롭게 떨어질 수 있었다 추락 자체가 일종의 해석 자신에게 들려주는 해설이었으므로
크레바스에 떨어지지 않은 나의 그림자가 위에서 내려다본다 구멍 속으로 콸콸 쏟아지는 녹슨 피리 소리를 들려준다 새파랗게 질린 채 둥둥 떠다니는 빙하조각을 집어먹었다 그 안에 든 햇빛을 먹으며 고독도 요기가 된다는 사실을 배운다 얼음 속을 갇힌 소리를 깨부수기 위해 실패한 탐험가처럼 생환일지를 쓰기로 한다 햇빛에 발이 시럽다
독도 문예대전 (입상작) / 오영록 (0) | 2018.07.30 |
---|---|
오영록 / 문경새재 / 문경새재 창작 시 공모(희양산성) (0) | 2018.07.29 |
2018 / 동아일보 신춘문예 (복도 / 변선우) (0) | 2018.07.19 |
2018 / 국제신문 (미륵을 묻다 / 김형수) (0) | 2018.07.18 |
2018 / 조선일보 (돌의 문서 / 이린아) (0) | 2018.07.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