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학 / 노향림
우리 아파트 바로 위층엔 신혼 부부가 세들어 삽니다.
원양어선을 타고 결혼식 다음날 떠난 신랑을 기다리는
그녀는 매일 종이학을 날립니다
한두 마리 날아 오르다가 수십 마리가 우리집 베란다에
떨어져 죽습니다. 그중 몇 마리는 아직
허공을 날고 있습니다
날개 없는 학을 무엇이 날려주는 지 모른채
나도 마주 손 흔들어 줍니다
어느덧 그녀의 하늘에서 나는 흔들립니다
종이학이 날아올 때마다 덜컹대는 창문,
새로 돋는 아이비 덩굴손도 흔들립니다
허물린 담장 위엔 이승의 보이지 않는
새파란 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매캐한 하늘 속 홀로 있어도
그리움 깊으면 흔들린다는 사실이
황홀해져 또 다시 흔들립니다
불현듯 그대에게 날려보낸 학 한마리는
기다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꽃들은 경계를 넘어간다 / 노향림
꽃들이 지면 모두 어디로 가나요
세상은 아주 작은 것들로 시작한다고
부신 햇빛 아래 소리없이 핀
작디 작은 풀꽃들,
녹두알만 한 제 생명들을 불꽃처럼 꿰어 달고
하늘에 빗금 그으며 당당히 서서 흔들리네요
여린 내면이 있다고 차고 맑은 슬픔이 있다고
마음에 환청처럼 들려주어요
날이 흐리고 눈비 내리면 졸졸졸
그 푸른 심줄 터져 흐르는 소리
꽃잎들이 그만 우수수 떨어져요
눈물같이 연기같이
사람들처럼 땅에 떨어져 누워요
꽃 진 자리엔 벌써 시간이 와서
애벌레처럼 와글거려요
꽃들이 지면 모두 어디로 가나요
무슨 경계를 넘어가나요
무슨 이름으로 묻히나요
프루스트의 숲에 가서 / 노향림
아직 가지 않은 길은 아름답다.
누구든지 잠 못 이루며
프루스트의 숲 가까이서
혹은 멀리서
그 길을 바라보리라
꿈 속에서도
나무들은 말방울소리에
귀 열어놓고 잔다
저 은사시나무숲,
숲은 은빛 바늘을 숨기고
바람부는 대로
그 바늘들을 털어낸다
날은 어두워오고
눈 내릴 듯 흐린 날
나의 눈엔 눈물 얼비친다
오, 누구든지 한 사람
아는 사람을
만날 것같다
아직 가지 않은 길은 아름답다
누구든지 잠 못이루며
프루스트의 숲 가까이서
혹은 멀리서
그 길을 바라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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