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여인 되어
노천명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 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유월의 언덕
노천명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하늘은
사뭇 곱기만 한데 ....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고 안으로 안으로만 들다
이 인파 속에서 고독이
곧 얼음 모양 꼿꼿이 얼어 들어옴은
어쩐 까닭이뇨 ....
보리밭엔 양귀비꽃이 으스러지게 고운데
이른 아침부터 밤이 이슥토록
이야기해 볼 사람은 없어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어 가지고 안으로만 들다 ....
장미가 말을 배우지 않은 이유를알겠다
사슴이 말을 하지 않는 연유도알아듣겠다.....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언덕은 곱기만 한데...
당신을 위해 / 노천명
장미모양
으스러지게 곱게 되는 사랑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죠?
감히 손에 손을 잡을 수도 없고
속삭이기에는 좋은 나이에 열없고
그래서 눈은 하늘만을 쳐다보면
얘기는 우정 딴 데로 빗나가고
차디찬 몸짓으로 뜨거운 맘을 감추는
이런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죠?
행여 이런마음 알지 않을까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그가 모르기를 바라며 말없이
지나가려는 여인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죠?
들국화 / 노천명
들녁 경사진 언덕에
네가 없었던들
가을은 얼마나 쓸쓸했으랴
아무도 너를 여왕이라 부르지 않건만
봄의 화려한 동산을 사양하고
이름도 모를 풀틈에 섞여
외로운 계절을 홀로 지키는
빈 들의 색시여
갈꽃보다 부드러운 네 마음 사랑스러워
거친 들녁에 함부로 두고 싶지 않았다
한아름 고이 안고 돌아와
화병에 너를 옮겨 놓고
거기서 맘대로 자라라 빌었더니...
들에 보던 그 생기 나날이 잃어지고
웃음 거둔 네 얼굴은 수그러져
빛나던 모양은 한 잎 두 잎
병들어 갔다
아침마다 병이 넘는 맑은 물도
들녁에 한 방울 이슬만 못하더냐
너는 끝내 거치른 들녘
정든 흙냄새 속에
맘대로 퍼지고 멋대로 자랐어야 할 것을
뉘우침에 떨리는 미련한 손은
이제 시들고 마른 너를 다시 안고
푸른 하늘 시원한 언덕 아래
묻어 주러 나왔다
들국화야
저기 네 푸른 천장이 있다
여기 네 포근한 갈꽃 방석이 있다.
사슴 /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 본다.
4월의 노래 / 노천명
사월이 오면, 사월이 오면은
향기로운 라일락이 우거지리 회색빛 우울을 걷어 버리고
가지 않으려나 나의 사람아
저 라일락 아래로 라일락 아래로 푸른물 다담뿍 안고 사월이 오면
가냘푼 맥박에도 피가 더하리니
나의 사람아 눈물을 걷자
청춘의 노래를 사월의 정령을
드높이 기운차게 불려 보지 않으려나
앙상한 얼골이 구름을 벗기고
사월의 태양을 맞기 위해 다시 거문고의 줄을 골라
내 노래에 맞추지 않으려나
나의 사람아!!
저녁별/ 시.
노천명
그 누가 하늘에 보석을 뿌렸나
작은 보석 큰 보석 곱기도 하다
모닥불 놓고 옥수수 먹으며
하늘의 별을 세던 밤도 있었다
별하나 나하나 별두울
나두울 논뜰엔 당옥새 구슬피 울고
강낭수숫대 바람에 설렐 제
은하수 바라보면 잠도 멀어져
물방아소리-
들은 지 오래
고향하늘 별 뜬 밤 그리운 밤
호박꽃 초롱에 반딧불 넣고
이즈음 아이들도 별을 세는지
고 향
노천명
언제든 가리
마지막엔 돌아가리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조밥이 맛있는 내 고향으로
아이들 하눌타리 따는 길머리엔
학림사 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대낮에 여우가 우는 산골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를 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둥글레 산에 올라 무릇을 캐고
접중화 싱아 뻐꾹새 장구채 범부채
마주재 기룩이 도라지 체니 곰방대
곰취 참두릅 훗잎나물을
뜯는 소녀들은
말끝마다 꽈 소리를 찾고
개암살을 까며 소녀들은
금방망이 은방망이 놓고 간
도깨비 얘기를 즐겼다
목사가 없는 교회당
회당지기 전도사가 강도상을 치며
설교하는 산골이 문득 그리워
아프리카에서 온 반마처럼
향수에 잠기는 날이 있다
언제든 가리
나중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
메밀꽃이 하아얗게 피는 곳
나뭇짐에 함박꽃을 꺾어오던 총각들
서울 구경이 원이더니
차를 타보지 못한 채 마을을 지나겠네
꿈이면 보는 낯익은 동리
우거진 덤불에서찔레순 꺾다 나면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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