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가죽 구두 - 김기택
비에 젖은 구두 뻑뻑하다 발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신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구두는 더 힘껏 가죽을 움츠린다 구두가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린 적은 없었다 구두 주걱으로 구두의 아가리를 억지로 벌려 끝내 구두 안에 발을 집어넣고야 만다 발이 주둥이를 틀어막자 구두는 벌어진 구두 주걱 자국을 천천히 오므린다 제 안에 무엇이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소가죽은 축축하고 차가운 발을 힘주어 감싼다
얼룩
달팽이 지나간 자리에 긴 분비물의 길이 나 있다
얇아서 아슬아슬한 갑각 아래 느리고 미끌미끌하고 부드러운 길
슬픔이 흘러나온 자국처럼 격렬한 욕정이 지나간 자국처럼
길은 곧 지워지고 희미한 흔적이 남는다
물렁물렁한 힘이 조금씩 제 몸을 녹이며 건조한 곳들을 적셔 길을 냈던 지리, 얼룩
한때 축축했던 기억으로 바싹 마른자리를 견디고 있다
소나무
솔잎도 처음에는 널따란 잎이었을 터. 뾰족해지고 단단해져 버린 지금의 모양은 잎을 여러 갈래로 가늘게 찢은 추위가 지나갔던 자국, 파충류의 냉혈이 흘러갔던 핏줄자국.
추위에 빳빳하게 발기되었던 솔잎들 아무리 더워져도 늘어지는 법 없다 혀처럼 길게 늘어진 넓적한 여름 바람이 무수히 솔잎에 찔리고 긁혀 짙푸르러 지고 서늘해진다.
지금도 쩍쩍 갈라 터지는 껍질의 비늘을 움직이며 구불텅구불텅 허공으로 올라가고 있는 늙은 소나무그 아래 어둡고 탄 땅 속에서 우글 우글 뒤엉켜 기어가고 있는 수많은 뿌리들.
갈라 터진 두꺼운 껍질 사이로는 투명하고 차가운 피, 송진이 흘러나와 있다 골 깊은 갈비뼈가 다 드러나도록 고행하는 고승의몸 안에서 굳어져버린 정액처럼 단단하다.
빗방울 길 산책
비 온 뒤 빗방울 무늬가 무수히 찍혀 있는 산길을 느릿느릿 올라갔다 물빗자루가 한나절 깨끗이 쓸어놓은 길발자국으로 비질한 자리가 흐트러질 세라 조심조심 디뎌 걸었다 그래도 발바닥 밑에서는 빗방울 무늬들 부서지는 소리가 나직하게 새어 나왔다 빗물을 양껏 저장한 나무들이 기둥마다 찰랑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비 그친 뒤도 푸르러지고 무성해진 잎사귀들 속에서 젖은 새 울음소리가 새로 돋아나고 있었다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빗방울 길 돌아보니 눈길처럼 발자국이 따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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