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더위가 늦게까지 머무는 일기변화로 단풍산행이라 하기엔 좀 이르긴 하나,
예전 같으면 이때쯤 설악산은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 계절이다.
그래서 설악산을 가려면 언제나 9월 말일경으로 날을 잡았는데. 장수대에 도착하니 뜻밖에 한산하다.
시간이 일러서인가?
(천남성 열매- 맹독성)
버스는 십이선녀탕 계곡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오늘 목표지점은 복숭아 탕까지다. 배낭을 메고 초입으로 들어섰다.
내가 길을 잘못 들어섰는가?
찰찰 흐르던 물길도 보이지 않고, 계곡 언저리에 자연스레 자라던 풀도 없다.
다 드러난 계곡 속살이 상했다.
수마의 흔적이다. 30분을 걷고 한 시간을 걸어 들어갔으나 여전히 상처가 크다.
예전에 보았던 아름다운 풍경은 사라졌다.
상상외로 변한 계곡이 낯설기도 하고, 그 낯선 곳에서 예전에 기억을 떠올리며 장소를 더듬어본다.
도무지 알 수 없다.
계곡에 내려가 손을 씻던 곳도. 벌에 쏘이던 너럭바위도, 밥 먹던 장소도 사라졌다.
숲과 하늘만이 그대로 있을 뿐.
(산앵두- 새콤 달콤한 맛이 난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맺혔다가 흘러내린다.
구름다리 위에 멈춰 서서 먼 산을 바라본다.
여전히 가을 하늘은 맑고 푸르다.
여기저기 가뭄에 말라 오그라든 나뭇잎들 사이 단풍이 보인다.
한 시간 삼십 분을 더 오르니 폭포 언저리 햇볕에 반사된 희디흰 바위 사면이 보인다.
조심스레 폭포 쪽으로 건너갔다.
걸음이 점점 조심스러워지는 것을 보면 나이에는 어쩔 수 없다.
돌로 메워진 복숭아 탕, 그 아래 또 한 웅덩이 언저리에 쌓인 돌무지 높고 먼 데서 굴러왔을 불청객 같은 바위에 걸터앉았다.
복숭아 탕으로 흐르는 물은 약하나 소리는 제법 크게 들렸다.
한참을 앉아 있으니 물소리가 나를 에워싼다.
햇볕 쪽으로 등을 내밀었다. 따스하다
사진 찍다 물에 젖은 신발과 양말을 햇볕에 널어놓고 책을 펼쳤다.
남미 볼리비아 여행기인데, 젊은 작가의 톡톡 튀는 맛깔스러운 글에 몰두하였다.
" 누구에게로 향하는 길은 예외 없이 인생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
삶 전체를 걸고 길에 올라야 한다는 사실.
그 정도 가치를 걸지 않고는 원하는 곳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 .
그래. 이것은 모든 사람이 택한 길이 아닌가 싶다.
그럼 나는 내 길에 삶을 다 걸었는가? 하고 내게 물어본다.
그럼. 다 걸었지. 가끔 내 인생을 저울질하며 되돌리고 싶을 때가 있다는 것만 제외하고는.
작가는 나에게 묻는다.
지켜야 할 가치 하나 안고 사는가? 하고 .. 사랑? 자식? 나의 인생? 글쎄다.
아~~ 어렵다. 책장을 한 장 훌쩍 넘겼다.
빵을 구워 팔아야 하루를 산다는 얼굴이 까무잡잡한 여자아이가 책 속에서 나를 보고 웃고 있다.
순수한 맑은 눈과 마주쳤다. 절로 미소가 흐른다. 사천 미터에서 사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자니
등에 닿은 볕이 달아올라 더 가깝게 느껴진다. 4,000m 가까이 내가 머무는 것처럼.
고개를 젖히고 폭포 위를 바라보니 붉은 단풍나무 배경에 파란 하늘이 유난히 짙다.
등산인들이 내려오고 올라간다.
어떤 남자는 야호 하고 소리를 지른다. 여자들이 연방 따라 한다.
신발과 양말을 뒤적거리며 햇볕 쪽으로 다시 널어놓고 있는데 산에서 내려온 젊은 남자가 옆으로 다가와서 손을 씻으며
우리 팀이 곧 올 거라면서, 정상에서 연예인 최진실 죽었다는 방송을 들었다고 전해준다.
오랫동안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이야기를 듣고 말을 했다.
젊은이도 떠나고 또 혼자가 되었다.
자연에서는 혼자도 심심하지 않다. 주위에 풍경들이 지켜보아 주니까.
물소리가 소란스러워도 시끄럽지 않다.
한 곳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나무나 바위도 다 고독할 것 같기에 나의 적적함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웅덩이에는 동그란 물 파장에 단풍잎들이 동동 떠다닌다.
바위 위에는 햇볕이 늘어지게 누워있고, 종종 새 소리도 들린다.
다양한 모습들이 어우러진 풍경, 나름대로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며 서로 오래도록 바라보는 덤덤한 풍경.
그 한 귀퉁이에 내가 엑스트라처럼 있다.
책 속에 있는 글귀 "지켜야 할 가치 하나 안고 살아라." 하는 말을 생각하며.
어디서든지 어우러져 한 그루 나무처럼 지켜야 할 가치 하나 안고 살아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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