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불멸 <숲에 들 때>/사랑의 기억 / 이기철

마중물/시인들 시

by 김낙향 2014. 1. 9. 23:50

본문

불멸

   -숲에 들 때

 

 

 

 

   

 

 

 

 

 

  오늘 몇 리를 걸었느냐 물으면 나무가 무어라 대답하겠어요

  아무리 몸을 합쳐도 도시를 이룰 수 없는 나무들이 푸름을 합쳐 숲을 이루는 것을 보십시오

  나는 올해 나무가 작년 나무보다 훨씬 젖이 커진 것을 분명히 봅니다

  이게 불멸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밤 오기 전에 꽃 아기들을 재워놓고 별과 함께 즐거운 식사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나무들이 보입니까

  안 보인다면 당신, 몸 속 위나 창자를 말끔히 헹구고 오십시요

  그러면 키 큰 빌딩들이 새를 부르지 못하는데 그 아래 선 나무들이 새를 불러 모으는 이유를 알 것입니다

  그러면 저 푸름 다 마신 해가 건들건들 취해서 돌아가는 이유를 알 것입니다

  사람들이 남향을 그리워할 때 나무들이 서향을 불러내는 이유를 알 것입니다

 

  여기 와서 숲 아닌 것을 무슨 이름으로 부르겠습니까

  그러니 당신, 숲에 들어올 땐

  흰 발꿈치를 깨끗이 씻고 정적 한 접시를 들고 들어와야 합니다

  정적의 쟁반엔 때로 무한이 새싹으로 돋아나기도 하니까요

 

  이기철 시집 「나무, 나의 모국어」(민음사. 2012)

 

 

 

 사랑의 기억 

 

 이기철

 

 

 시집 한 권 살 돈이 없어 온종일 헌책방 돌 때 있었네

 남문 시장 고서점, 시청 옆 헌책방 돌 때 있었네

 하루에 서른 편 키 큰 서가 아래 지팡이처럼 서서 읽을 때 있었네

 모두들 서럽고 쓸쓸한 말로 시의 베를 짜고 있었네

 귀에는 벌 떼 잉잉거리고 눈시울엔 안개비 촉촉이 서렸었네

 어쩌다 맘에 드는 시 한 편 만나면 발길 돌리지 못하고

 꽃술의 꿀벌처럼 뱅뱅거리다가

 주인 눈살 피해 서너 번 문을 여닫을 때 있었네

 더러는 노트 조각 찢어 열 줄 시를 베꼈네

 주인 몰래 책장을 찢고도 싶었으나, 이게 시인데 시는 아름다운 것인데, 나를 달래며

 내일 또 오지, 모레 또 오지

 문을 밀고 나올 때 있었네

 그때마다 엷은 등에는 시구들이 고딕으로 찍혔었네

 시집 이름 기억 안 나도 머릿속에 베껴 논 시구 선명해

 내일 또 와 베낄 거라고

 문을 밀고 나오는 발등에 뜨거운 것이 툭-하고 떨어졌네

 머리카락 위로 낙엽이 시가 되어 내려앉았네

 사랑이 깊었던 날들이었네

 지금도 너 어디 있느냐 묻고 싶은 날들이었네

 달려가 와락 끌어안고 싶은 날들이었네

 

 

'마중물 > 시인들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목련 / 김경주  (0) 2014.01.10
생의 노래 / 이기철  (0) 2014.01.09
문門 / 오영록  (0) 2014.01.08
바지락을 캐면서 / 강성백  (0) 2014.01.08
달력의 거리 / 손미  (0) 2014.01.06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