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 돋는 나무들은 나를 황홀하게 한다
흙 속에서 초록이 돋아나는 걸 보면 경건해진다
삭은 처마 아래 내일 시집 갈 처녀가 신부의 꿈을 꾸고
녹슨 대문 안에 햇빛처럼 밝은 아이가 잠에서 깨어난다
사람의 이름과 함께 생애를 살고
풀잎의 이름으로 시를 쓴다
세상의 것 다 녹슬었다고 핍박하는 것 아직 이르다
어는 산 기슭에 샘물이 솟고
들판 가운데 풀꽃이 씨를 익힌다
절망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지레 절망을 노래하지만
누구나 마음속에 꽃잎 하나씩은 지니고 산다
근심이 비단이 되는 하루, 상처가 보석이 되는 한 해를
노래할 수 있다면
햇살의 은실 풀어 내 아는 사람들에게
금박 입혀 보내고 싶다
내 열 줄 시가 아니면 무슨 말로
손수건만한 생애가 소중함을 노래하리
초록에서 숨쉬고 순금의 햇빛에서 일하는
생의 향기를 흰 종이 위에 조심히 쓰며.
*이기철
1943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났다. 영남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2년 「현대문학」으로 시단에 데뷔했고, 1976년부터 '자유시' 동인으로 활동했다. 김수영문학상(1993)외 문학상 다수 수상.
시집으로 <낱말 추적>, <청산행>, <전쟁과 평화>, <우수의 이불을 덮고>, <내 사랑은 해지는 영토에>, <시민일기>,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열하를 향하여>, <유리의 나날>, <청산행>, <가혹하게, 그리운 여름> 등이 있다. 대구시인협회 회장을 지냈으며 2005년 현재 영남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멍 / 낮은 음자리 / 美山 원연희 (0) | 2014.01.11 |
---|---|
목련 / 김경주 (0) | 2014.01.10 |
불멸 <숲에 들 때>/사랑의 기억 / 이기철 (0) | 2014.01.09 |
문門 / 오영록 (0) | 2014.01.08 |
바지락을 캐면서 / 강성백 (0) | 2014.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