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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현실 그리고 현실 너머

마중물/시인들 시

by 김낙향 2014. 5. 16.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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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 현실 그리고 현실 너머  

 

  시를 쓴다는 것은 때로는 지극히 간접적이어서 밀교의 방을 수십 칸 만들어 놓는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놀랍도록 직접적이어서 가장 짧은 길을 따라 가장 단순한 전략으로 단 한 칸의 방을 열어 놓는 행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개인적, 사회적 상황에 응전하는 시인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단순하고 직접적인 언어를 요구하는 시대로 가고 있거나,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왠지 자꾸 드는 오늘이다. 비극의 시대가 비등점에 달하고 있음을 알리는 징조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시를 읽는 다는 것, 쓴다는 것이 현실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오늘’이라면, 하는 상념의 너울을 넘으면서 다음의 시들을 읽어 본다.   

 

  내가 잠든 밤 설산고도를 야크인 아버지가 지나고 있다.

  야크의 울음은 꿈의 발원지, 울음 울 때마다 푸른 꿈이 흘러내리지만

  지금은 만년 눈발을 등짐으로 지고 포근한 명상에 잠겨야 할 야크가

  질긴 무릎으로 소금덩이 지고 천 길 낭떠러지 위를

  몇 천 년 전에도 갔듯 아슬아슬 가고 있는 밤이다.

  모두가 잠들어 이룬 잠의 산맥위로 불면의 야크인 아버지가 가고 있다.

  간 맞지 않는 밥상 미네랄 결핍의 어린 짐승의 혓바닥을 찾아

  지혜의 눈으로 희박해지는 푸른 세월을 견디며 가고 있다.

  때로는 등짐을 영원히 내려버리려는 야크가

  스스로 아득한 낭떠러지로 헛발 디뎌버리기도 했지만

  이제는 설산고도보다 더 새파랗게 깎아지른 정신으로 간다.

  나는 남을 위해 널찍한 등으로 그 무엇 하나 진적 없고

  이 강한 무릎으로 선 뜻 힘겨워하는 사람의 짐을 들어준 적 없는데

  마른 풀 몇 줌을 씹어 삼킨 야크가 어떤 호의호식도 바라지 않는 야크가

  순도 높은 꿈의 암연을 지고 산산이 부서지는 별빛을 맞으며

  우주의 모서리를 스쳐서 설산고도를 지나고 있다.

 

  모든 것을 달관한 것 같은 야크의 얼굴, 믿음이 가는 야크의 얼굴

  우리가 잃어버린 얼굴, 우리가 오래 바라보아야 할 아버지의 얼굴

 

  누가 재촉하거나 채찍으로 위협하거나 쫓아오거나 하지 않는 데도

  야크는 성실한 보폭으로 설산고도를 가고 있다.

  희망의 대물림인 그 길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가고 있다.

  먼 씨족의 마을 동치미 그릇에 아버지 이름이 살얼음처럼 둥둥 뜨는데

  한 알 소금이 한 망울 희망으로 맺히는 곳으로 꿈의 전령으로 가고 있다.

  아버지의 목숨 칼날 같은 설산고도위에 아슬아슬 얹어놓고 가고 있다.

  나는 나만의 길을 지금껏 걸어왔는데 자칫 누군가에 밀려 길을 벗어나면

  증오하고 통곡하며 퍼질러 앉아 누가 손 내밀어 주기를 기다렸는데

  지금 우리의 곤한 잠 위로 그 무엇에도 무릎 꿇지 않는 야크가

  누가 쌍수를 흔들며 멀리서 마중 나오는 것도 아닌데 가고 있다.

  야크의 길이야 설산고도 양지바른 풀밭으로 가는 것이지만 그 길 접어두고

  소금 짐 지는 길이 아버지 길이라며 만년설 위에 발자국 꾹꾹 새기며

  오랫동안 길에 중독된 듯 설산고도를 가고 있다.

  아버지의 길이란 위대한 길인데도 우쭐대지 않으면서 야크로 가고 있다.

  때로는 야크의 몸속으로 소금 같은 차디찬 만년설이 내리는데 가고 있다.

 

  내가 닮고 싶은 야크가, 천년 고집처럼 저기 가고 있다.  

 

  - 김왕노, 「야크로의 명상」, 『시와 표현』 2014년 봄호

  

 왕노의 시  「야크로의 명상」은 위대함이란, 또는 그것이 만들어내는 고고한 아름다움이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노래한다. 그것은 “성실한 보폭”으로부터 기인한다. “쌍수를 흔들며 마중 나오는” 것과 같은 가시적인 성과나 실패에 얽매이지 않고, 요란 떨지 않고 오로지 “설산고도”를 향한 지향 의지를 실천하는 존재, 그러므로 가능한 “설산고도보다 더 새파랗게 깍아지른 정신”의 소유자, “아버지”란 결국 시인이 “닮고 싶은 야크”의 발자국을 고집하는 자. 고집과 무뚝뚝함과 등등의 이면에 여전히 유효한 “꿈의 전령”이 가로지르는 횡보에 대한 헌사의 언어를 읽어본다. 요즘 드문 만남이다.   

 

  객지를 돌던 나는 손님처럼 귀가했다

  외투 주머니에서 허름한 바다를 바닥에 쏟아냈다 가시만 남은 배 한 척이 거울에 앉아있었다

 

  나는 너무 늦게 귀향했고, 예고 없이 떠나가는 것들은 매번 조용했다

  편백나무 五里길 너머 폐교 교실엔 항로를 일러주는 선생님이 없다 날개에 지도를 그려놓은 나비는 먼지와 함께 굳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먼지는 항상 소리 없는 곳에서 자랐다

 

  빈 방에서 먼지는 내 흔적을 먹고 살았다 내 방에서 나는 점점 사라졌다, 먼지뿐인 낯선 방을 떠날 때마다

 

  돌아올 채비를 꾸리지 않았으므로, 이번이 마지막이다, 마지막 항해다, 먼지 위에 포개 놓인 유언은 언제나 유효했다

 

  자정 무렵 잠깐, 弔燈 주위로 소란이 짠물처럼 밀려왔다

  내 입에서 소금냄새가 났다

  바다를 베어 먹은 나는 맘껏 배불렀으니, 이제 맨발로 떠날 수 있겠다

 

  부서진 배 조각을 내 몸에 대고, 나비가 못질을 시작했다

 

  가시만 남은 목선에 먼지가 돋아나고 있었다

  - 최은묵, 「木船」, 『시로여는세상』, 2014년 봄호

 

  최은묵의  「木船」은 ‘떠나는’ 존재를 따라 ‘오는’ 존재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양자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극을 숙명으로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내 방에서 나는 점점 사라졌다”와 “나는 손님처럼 귀가했다”는 서로의 이면으로 작용하며 동시에 결코 메워지지 않는 간극을 통해 서로를 잡아당긴다. 그리고 이 간극으로 밀려오는 “목선”에 매단 “弔燈”이란 다름 아닌 ‘떠났다/돌아왔다’가 아니라, ‘떠났으나/돌아왔으나’라는 여분의 그리움을 켜놓은 것. “나비가 못질을”하는 노래를 환하게 만드는 이유일 것이다.

  

  1.

  담이 말을 걸면 담 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그 말을 듣는다

  내가 말을 걸면 키 큰 남자같이 바람막이하고

  내말을 귀담아 듣는다

 

  2.

  옥이가 안에서 담벽을 만지며 걸어가다가

  돌이가 밖에서 담벽을 만지며 걸어오다가

  안과 밖에서 두 손바닥이 마주치더니 같은 쪽으로 걸어간다

  두 손이 나란히 같은 쪽으로 가다가

  같은 쪽으로 온다

  허공에 뜬 달이 한밤 내 내려다보다가

  마침내 담을 지워버린다

 

  해가 뜨면 달은 다시 제자리에 담을 세우고

  골목길이 앙살을 피우며 담을 따라 휘돌아가고

  - 김규화, 「담 이야기」 『시산맥』 2014 봄호

 

  담백할 뿐인 또는 미묘할 뿐인 노래가 아닌, 담백한데 미묘할 때가 있다. 미묘한데 담백할 때가 있다. 김규화의 「담 이야기」가 재미있는 이유이다. 그의 시는 담벽 ‘안과 밖’이, ‘걸어가다와 걸어오다가’ 분명하게 대응하고 구별되다, 어느 순간 “마침내 담을 지워 버리”며 서로를 넘나든다. 담 안의 “옥이”와 담 밖의 “돌이”는 분명히 개별적이면서 동시에 서로를 지향하고 궁극에는 서로의 경계를 지운다. 그러나 경계는 지워진 것이기보다는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투명하다. 또는 열려 있다. 그러므로 안과 밖은, 나와 너는,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은 분명히 구별되며 서로를 근거로 삼는다. 그러므로 안의 확장이 밖을 억압하지 않는다. 그 반대도 아니다. 안의 확장이며 밖의 확장이다. 그 분명함과 미묘함이 담을 따라 휘돌아가는 “골목길”이 앙살을 피우는 바탕일 것이다.  

 

  아마존 전사가 되기 위해선

  총알개미 성년식을 치러야 한다

  신의 영혼을 불러 인간이 되는 의식은

  잔혹하다

  인디오 부족들이 독 오른 수백 마리의 총알개미를

  대나무 장갑 속에 넣고,

  열 살 소년은 그 속에 두 손을 집어 넣는다

  세 번 기절하고 세 번 깨어나

  비로소 성년이 되었다, 아마존의 전사가 되었다

 

  나도 총알개미 성년식을 치렀다

  양 어깨뼈에 나사못을 박고

  끊어진 힘줄을 잡아당겨 묶었다

  화살이 날아와 몸속에 박히고

  뚫린 구멍 속으로 총알개미들이 파고들었다

  화염방사기가 온몸을 덮쳤다

 

  잠의 동굴에서도

  왼쪽과 오른쪽을 넘나드는

  고통의 간격을,

  내 몸속에 박힌 일곱 개의 못과 거기에 매겨진 번호를

  기억하려 애썼다

  고통 때문에, 슬픔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고

  되뇌며,

 

  이렇게 일흔에 성년이 되고서야

  내 몸의 절반이 고통으로 이뤄졌음을 알고서야

  고통은 따뜻한 비애가 되었다 

  - 이명수, 「총알개미 성년식」, 『시로 여는 세상』 2014년 봄호

 

  이명수의  「총알개미 성년식」의 시는 고통을 탁본한다. 관심이 가는 것은 언어가 고통을 만든다기보다는 고통이 언어를 만들고 있다는 데에 있다. “몸 속에 박힌 일곱 개의 못과 거기에 매겨진 번호”를 “고통 때문에, 슬픔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고 되뇌며” 직시하며 본을 뜬다. 정서의 말랑함을 발라낸 단단한 뼈의 언어로 “뚫린 구멍 속으로” 파고드는 “총알개미들”을 하나하나 분명하게 찍어내는 힘의 노래이다. 그러므로 “일흔에 성년이 되고서야”라는 성찰의 이력이 가획 없는 생생한 맨 얼굴로 적나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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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무령 편집위원

 

 

충남 홍성에서 출생.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과, 同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9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 2004년 〈대산문화재단창작기금〉 수혜. 시집선사시대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다』와 저서 『한국 현대시의 ‘경물’과 객관성의 미학』 등이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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