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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뜰/마음 안에 풍경.2

by 김낙향 2020. 8. 11.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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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티브이를 보고 있다

여자는 외등 밑에 서 있다

 

습하고 의뭉한 밤이 안개를 밀어 올린다

안개를 들이마신 여자는 연거푸 기침하다가 결국 휘파람을 길게 내뱉는다

 

남자는 티브이 앞에서 잠들었다

 

여자는 단풍나무에 감긴 비닐 끈을 걷어내고 바닥에 낙엽의 행적을 궁금해하다가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신문지에 불을 붙인다 붉은 뱀처럼 기어가는 불꽃에 타다 남은 낙엽이 들켰다 어제도 오늘도 낙엽을 끌어다 화장火葬한 것은 아궁이였다 여자는 새벽 별처럼 드문드문 남아 있는 불씨 위로 치마에 버섯처럼 돋은 보푸라기를 하염없이 떼어내고 있다 후루룩 타는 보푸라기, 여자의 몸을 뚫고 나온 나방인 듯

 

티브이 앞에서 잠들었던 남자가 보이지 않는다

 

 

김락향 <에움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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