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리가 내린 날
감나무에 매달려 있던 까치밥
흰 두건을 썼고
늙은 백일홍 상복을 입었다
상수리나무와 은행나무도 휑한 모습으로
문상객처럼 서 있고
텅 빈 화분과 항아리 실금 사이로
눈물길이 명료하게 드러나고
단풍잎도 다 화장을 지웠다
모든 초목
그동안의 과욕과 허울을 벗어버리는 예식이다
온갖 사유의 수채를 다 지우며
해마다 한 번쯤은 하얀 생애에 뛰어들어
나를 비워내야겠다
봄날 새순처럼 새롭게 피어날 나를 위하여
<에움길 시집 / 김락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