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나무
내 집 입구에는 나의 엄마 나이만큼 늙은 단풍나무 여섯 그루가 쭉 서 있다.
사방이 소나무 숲인 우리 동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유일한 단풍나무다.
여름이면 풍성한 그늘을 만들고, 가을이면 물든 단풍이 햇살을 머금어 화려하기에 그지없다.
십일월에 접어들면, 겨울을 부추기는 바람에 맥없이 떨어져 햇살 한입씩 물고 있는 낙엽은 가슴이 싸하도록 아름답다
소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귀하고 아름답다 느껴지는 것은 일흔이 넘은 나이 탓만은 아니다. 예순이 갓 넘었을 때부터 나의 수채가 나의 일상에 서투른 붓질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십일월 초순이 막 지나갈 즈음이면,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시퍼렇기만 한 소나무의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투어 낙하한 단풍잎이 길에 즐비하게 쌓여도 쓸지 않았다. 그 붉은 낙엽들, 바람결에 몸을 일으켜 소나타를 연주하는 찬란한 허무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며 가을에 무르익는다.
그런데 엄마는 오늘도 저 단풍나무를 다 베어버리라고 성화다. 커다란 나무를 바라보면 왜 가슴이 답답할까?
무성한 그늘도 시원하고, 붉디붉은 나뭇잎도 아름답기만 하거늘. 왜 자꾸 베라고 하는지.
나만의 생각이지만, 아마 저 단풍나무가 엄마의 사생활을 다 알고 있어서다
나랑 같이 사는 동안 거푸 쏟아낸 엄마의 지난 삶을 헤쳐 놓고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사랑과 행복은 없었다. 어렵던 시절부터 아흔네 번째 세월을 견뎌내느라 옹이 졌던 감정을 버릴 곳이 없어 가슴에 쌓아두었다가 나에게 다 쏟아부었다. 일곱 해 동안, 생각해 보니, 나는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었다. 다 쏟아내고도 아직 흩어진 조각들이 남아 있어 문장을 이어 붙이느라 부사나 형용사 동사가 없는 주어만 되뇌거나 주어가 없는 동사만 고집하기도 한다.
치매와 우울증이 원인이라 하지만 그 쓰레기통이 꽉 차서 엄마의 푸념을 더는 담을 수가 없어 난 오늘도 거부한다.
'엄마, 슬프고 속상한 감정 말고 이젠 사랑의 감정, 즐거운 감정, 행복한 감정을 쏟아내세요."
"슬픈 감정 쓰레기통은 다 찼다고요, 더는 담을 곳이 없어요. 나의 일상이 매우 우울해요."
"좋았던 때를 떠올려 봐요, "
" 새색시 때, 여행 갔을 때, 엄마, 울릉도와 제주도 갔다 왔잖아요, 여든이 넘어서 백두산까지 다녀왔으면서"
" 이젠 제발 즐거운 생각만 해요. 응"
그 옛날 물을 퍼 나르던 우물도, 빨래를 하고 몸을 씻던 개울도, 호롱불도, 아궁이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며... 그 개울에는 고마리꽃이 만발하게 피었는데, 물봉선화도 곱게 피는데, 세탁기에, 전기압력솥에, 수돗물이 콸콸 나오고, 기름보일러에, 전기장판에, 그리하여 아궁이에 불을 지피지 않아도 되는 좋은 시절에 살고 있으면서 왜 그 고단한 시절에 매몰되어 있는지. 이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참 힘들다.
그놈의 치매는, 우울증은, 사랑보다 행복보다 슬픔이 색채가 더 짙어 그 짙은 색채를 감당 못 해서 자꾸 눈물로 퍼내는가.
사랑이나 행복처럼 평등하지 않았던 슬픔을 견뎌낸 표정을 아흔이 넘어서기까지 표출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안타까움이기도 하다.
또 내 생각인데, 엄마의 생을 뻔하게 알고 있는 나무가 그래서 너무 싫어졌는가?
젊어서는 느끼지 못했던 것이, 언젠가부터 소소한 것들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고 느껴졌다.
나무 한 그루마다 갖추고 있는 무늬 진 세월의 고유함과 그 고유함에 베어 있는 사계를 사랑한다.
엄마의 단기 기억이 상실되자 잦아지는 화에 시달릴 때는 나무 밑에 앉아 고이는 눈물을 말리기도 하고, 한참을 그 그림자처럼 멍하니 앉아 있기도 하다가 평온을 찾곤 한다.
나도 엄마만큼 늙어지면 혹, 나무 그림자가 추워 보이거나 엉큼해 보일까?
그러나 아직 나는, 이 가을 낙엽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사랑한다.
해마다 더 많은 소리를 내며 해마다 다른 감성을 느끼게 하는 저 단풍나무를 사랑하는 나의 가슴을 두 팔로 꼭 껴안아 주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