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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나의 뜰/마음자리

by 김낙향 2021. 3. 1.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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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부터 많은 진눈깨비가 내릴 거라는 재난 문자가 왔지만, 3월 첫날 내일은 휴무라 별걱정 없이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여니 사분사분 내리는 빗소리가 고요하기까지 하다. 땅은 촉촉이 젖어 있고 처마에서 졸졸 흐르는 빗물 소리가 청청하다.

영하 20도 추위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던 날들이 엊그제 같은데 계절은 바지런한 손길로 잠이 덜 깬 초목들을 보듬는다. 

바람 한 점 섞이지 않은 차분한 봄비 소리에 오늘따라 새들도 참견하지 않는 것이, 나처럼 고요히 턱을 괴고 소리를 즐기나 보다.

곧 뜰에는 모든 식물이 낡은 피복 사이로 새로운 자아를 태동하느라 대지가 들썩일 테지.

 

나는 월간 에세이를 펴고 작가들의 글을 읽는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보드랍게 나열한 글은 애쓰지 않아도 그들의 마음과 사고와 생각의 근력이 느껴진다.

내가 하찮게 여겼던 것이 어떤 이에게는 소중함이 되고, 내 생각과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며 공감해 주는 배려라든가, 누구나 겪는 생각지도 못했던 삶의 고도를 넘으며 마음을 다잡았던 작가의 글에 공감하면서. 나도 그 작가처럼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윤동주 서시 일부를 또 적어본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은 /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친다."

 

나이 칠십 중반에 들면 모난 말이든 각진 말이든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내며 받아넘기게 되는 것 아닐까.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마음에 넣어두면 가시가 돋쳐 불편해진다. 편안한 마음으로 살고 싶은 것이 지금 내 나이이다.

작가들의 연령을 떠나서 자분자분 읽히는 작가들의 에세이를 무늬로 그리며 마음에 담는 시간은 나에겐 겸양의 시간이다. 

오직 밥을 먹기 위해 나를 돌아보지 못하고 살아온 나는 남의 경험 후기와 지식을 통하여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

 

사춘기 학생처럼 지금도 다락방을 그리워한다. 모퉁이 방이라도 나 혼자 호젓하게 보낼 수 있는 곳. 

분당에 살 때는 아이들 다 떠나고 여분의 방이 있어 밤늦게 어쭙잖은 글도 써서 책 한 권을 냈는데, 시골에 와서는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서운하였다. 

자연과 사는 것은 자연인이 되어야 하는데 풀과의 투쟁을 벌이고 텃밭이라기엔 조금 부담스러운 노동을 하면서 또 나를 방치하곤 하였으니.

육 년이 지난 지금은 체력도 고갈되어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으며 지내려고 애쓴다.

이제는 바람도, 흔들리는 나뭇잎에 춤추는 거미줄도 보인다. 소소한 것들이 풍경으로 내게 다가올 때 비로소 내 안에 내가 보여 하루하루가 무료하지 않다.

 

살아내는 것은 감당하는 것이라 했던가.

나이 들어도 아직 내 안에는 소녀가 살고 있다. 참 다행한 일이다. 하루하루가 유쾌하지 않아도 유머러스하지 않아도 심심하지 않다. 느닷없이 닥치는 아픈 것들도 덜 고통스럽게 넘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아직 처마에서 물 흐르는 소리 들린다.

머지않아 연둣빛이 창궐할 것이다. 계절의 흐름에 따라 스며드는 나도 소녀의 봄날처럼 생기가 몸속에서 돋아 연둣빛이 찬란한 감성으로 뭐라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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