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차분히 내리는 오후, 커피가 식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베란다 탁자에 앉아 전경이 툭 터진 들과 먼 산을 바라보았습니다.
어제만 해도 해거름에 모종을 심어도 구슬땀이 흐르고 꼬부린 무릎은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고 녹내장 수술한 눈은 엎드리면 안 된다고 성화였는데, 차분히 내리는 빗소리 듣는 이 순간은 어제를 잊고 힐링하는 고즈넉한 시간입니다.
내 집 언저리 산은 온통 소나무라 늘 푸르러 봄이 와도 가을이 와도 계절이 보이지 않는데 소나무 아래 각시붓꽃과 진달래가 피거나 밭에 고추 모종이 심어지는 날이면 봄이구나 하고, 내 뜨락에 화초가 숨소리도 죽이고 흙을 밀어낼 때면 나도 숨소리 낮추고 봄기운을 들이마신답니다.
지금 목단이 꽁꽁 여미고 있는 앞섶 고름 하나를 풀려고 고요히 흔들리고 있답니다.
잔잔한 꽃이 무더기무더기 핀 백리향과 구름국화, 화려한 디기탈리스, 종다리꽃, 우아한 하얀 독일붓꽃이 음계처럼 한 옥타브씩 수채가 변화하고 있는 모습이 예쁘고 사랑스럽습니다.
비를 맞아 더욱 선명하고 청정한 수채를 통하여 내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꽃을 피우기까지 기운을 다 쏟아부으며 꽃샘추위를 견디고 가뭄과 바람에 흔들리는 고통에도, 한 번도 상처를 입지 않은 것처럼 곱고 아름다운, 바라보아 주는 이에게는 환한 사랑으로 향기를 나누어 주는 화초처럼 사람도 생활고에 시달려도 꽃처럼 고운 향기를 머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때 잠자고 머무를 방 한 칸을 구하느라 너무 고단해서 구질구질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내가 살아내느라 옆 사람에게 진실하게 꽃이 된 적 있었던가.
체면과 도덕을 저울질하며 그럴듯하게 보여주면서 위선으로 피워낸 꽃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돌이켜 봅니다.
환하게 웃는 꽃을 보며 안도현 시 한 자락 적어봅니다.
<연탄제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나이가 철들게 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꽃을 감상하다가 삶을 돌이켜보며 반성도 하고.
" 꽃이 예쁘다고 함부로 꺾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꽃(환희. 희망. 사랑)이 되어준 적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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