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숭이?
오늘 신부님 강론 중에 하신 말씀이다.
오랜 옛날 어떤 사람이 아프리카에 갔다가 본국에 보고하기를 털 많은 원숭이와 고릴라만 있고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더니, 무리 중 웃는 짐승이 사람이라고 했단다
이 말에 남편이 하던 말이 문득 떠오른다. "좀 웃어라. 하하 허허하고" 잘 웃지 않는 나는 그동안 원숭이였던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살아오는 동안 나는 잘 웃지 않았다는 말을 부정할 수가 없다. 일터에서 사람들이 일으키는 물결에 흔들리느라 늘 고단하였고, 삶의 물결의 높낮이를 감당하느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일터에서는 웃음을 아끼지 않았으나 일터를 벗어나면 늘 묵직하고 무덤덤한 분위기가 나였다. 아마도 많은 사람과 대화를 하다 보니 집에서는 자연히 말 수가 줄어들고 피곤 때문에도 말없이 고요히 있고 싶기도 했다.
늘 먹고사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느라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공원 갈 생각도 못했고 아이들도 의례 그러려니 하고 불평도 없었는데 괜스레 미안한 생각이 드는 휴일에는 산을 좋아하는 남편이 반강제로 아이들을 구슬려서 산을 오르니 힘들어서 입이 한 발이나 튀어나온 아이들을 다독이며 남편을 탓하느라 더더구나 웃을 일이 없었다.
친구를 만나 커피숍엘 가더라도 주로 듣는 분위기고 또 친구들도 서로가 닮는지 웃어도 깔깔거리거나 크게 웃질 않는다.
성격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점잖고 말을 아끼는 것이 미덕인 양 그리 살고 있는 나 같은 사람들이 많다.
신부님 강론을 들은 후 나와 내 주위를 돌아본다.
이웃이어도 친하지 않아서 마주쳐도 그냥 지나가고, 같은 엘리베니터를 이용한다고 아주 덤덤하게 눈인사를 찰나로 주고받을 뿐 나도 그 누구도 환한 웃음을 주고받는 것에 서로가 인색하였으니.
남편이 명랑하고 잘 웃는 여자를 좋아하는데, 말수가 적고 무덤덤한 나를 만나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속을 털어놓지만 이미 때는 늦었으니 어쩌랴.
남편의 농담에도 별 표정 없이 썰렁했던 나를 돌아본다. 늦었지만, 원숭이가 아닌 사람으로 살려면 소리를 내 웃지 않더라도 활짝 미소라도 지어야겠다.
길에서, 엘리베터 안에서, 집에서도 자주 활짝 웃어야겠다.
뜨악해하는 표정으로 이웃이 받아주고, 남편이 하던 대로 하라고 말을 하더라도. 사람이라면 웃어야 한다는 신부님 말씀을 상기하며 오늘부터라도 미소와 웃음을 아끼지 않고 나누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