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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천리에서

나의 뜰/마음자리

by 김낙향 2009. 2. 25.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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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천리에서

 

 

 

매주 산으로 가는 남편을 어쩔 수 없이 따라다니다가 나도 산 꾼이 되었다.

그동안 너무 걸어선지 무릎이 고장이 나고 말았다.

나이가 육십이 넘으니 생각 없이 부려 먹은 뼈가 성을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운동을 안 하면 그나마 더 못 걸을까 봐 생각한 묘안이 남편이 산에 가면 나는 산언저리에서 무리가 안 될 정도로 걷기로 했다.

충주호 언저리에 있는 상천 마을, 남편은 서둘러 산으로 들고 나는 천천히 남편이 간 길을 따라 걸었다.

아직 2월 중순인데 볕이 얼마나 따사로운지 밭둑에 아지랑이가 벌써 나온 것 같다.

동네 냇가 둑에는 풍채 좋은 소나무 여러 그루가 보디빌더처럼 잘생긴 신체를 자랑하듯 늘어서 있다.

길가에 산수유나무는 어설픈 모습으로 대열을 갖추고 서 있고, 산수유 열매보다 더 많은 새가 허공을 빈틈도 없이 콕콕 쪼아대는 소리가 요란하다.

이 새 소리의 합창에 산수유 열매는 여전히 붉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들에는 마른 풀대 시신들이 어수선하니 있어도 조금도 썰렁해 보이지 않는다.

씨앗을 품었던 대궁에는 씨앗이 빠져나간 빈집, 활짝 열린 집은 깔끔하다 못해 홀가분해 보인다.

 

혼자여도 소소한 풍경에서 읽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어 심심하지 않다.

 

산 위엔 마른 풀의 향기. / 들 가엔 장미들이 시드는 향기

당신에겐 떠나는 향기. / 내겐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

모든 육체는 가고 말아도, / 풍성한 향기 이름으로 남는

상傷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여. / 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것들이여...

 

<가슴이 붉은 딱새/ 오규원 무능일기>

 

죽은 풀에 집착처럼 매달린 상한 열매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만나지만, 자연에서 보는 그 그림자는 새로움이다.

다시 말해 죽음에서 보이는 허전한 향기랄까? 뭐 이런 느낌으로 다가와 노년으로 달리는 내게 뭔가 주제를 주는 것 같아서 생각이 깊어진다.

죽은 풀의 시신에서 씨앗이 빠져나간 자궁이 맑아 보인다거나, 생을 마감한 솔방울의 허허로운 모습이 혼자일 때 천천히 읽힌다.

 

용추폭포 쪽으로 걸으니 꽃망울이 탱탱한 꼬리진달래가 겨울을 견디느라 용을 써서 그런지 잎이 더 불그레하다.

금수산 둘레에는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멋스러운 경관을 품은 산이 여럿 있다.

호리병에 맑은 술을 담아 옆구리에 차고 산에 올라 소나무가 둘레둘레 있는 평평한 바위에 앉아 발아래 펼쳐진 충주호를 한가로이 내려다보며 술잔에 한시를 담아 읊으면 딱 어울릴 장소가 즐비하다.

선경을 접하면 디지털시대에 퐁당 빠진 사람이어도 옛 선비 흉내를 내고 싶어지는 곳이 충주호 근교 산들이다.

비록 지금은 다시 오르지 못하지만 이미 나의 기억에 선명하게 입력된 풍경이기에 산언저리에서 바라보며 추억을 되새김질한다.

 

병풍처럼 잇대어진 산을 보면서 오늘도 나는 설렌다.

종종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풍경들이 덤처럼 펼쳐지곤 할 때마다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 선물은 아무 때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산수유나무 터진 틈새로 속살이 부풀어 오른다. 건드리면 노란 피가 툭 튀어 오를 것만 같다.

산수유 숲을 보면 허리띠를 동여맨 빈곤이 떠오른다. 

씨앗을 빼내느라 상한 이빨을 드러내 웃던 어르신들이 보인다.

봄은 외유내강이다.

겨울을 견딘 자만 느낄 수 있는 계절이 봄 아닐까. 한다.

 

산수유 활짝 피는 봄날 비가 오면 충주호가 노랗게 물들 것 같다.

 

 

「평소 습관대로 책을 낀 채 오가다가 그는 어느 순간 몸을 기댈 곳을 우연히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어깨높이 정도에서 갈라져 있는 관목 갈래였고, 너무나도 쾌적하여 자기 몸이 떠받쳐지는 것을 느낀 나머지 그는 책도 읽지 않은 채, 거의 무의식적 명상에 잠겨 그 자연에 완전히 박혀 있었다.」라고 적은 "자연 합일의 한순간.(릴케의 글 중...)"글을 적어본다.

 

산이나 숲을 거닐다 보면 나도 이와 같은 순간을 경험한다.

나름대로 호젓한 시간을 보내면서 정신 맑아져 돌아온, 왕복 기름값이 아깝지 않다.

 

 

2009년 2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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