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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가는 날

나의 뜰/이야기

by 김낙향 2010. 9. 21.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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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가는 날

 

천둥 치며 비가 억수로 퍼붓는 아침, 산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망설였다.

산행지는 내장산 종주다.

중부지방만 비가 온다기에 배낭을 챙기고 나서면서 몇 명이나 나올까? 의구심에 어쩌면 취소될 수도 있다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고 나갔다.

출발 시각이 다가오면서 한둘 모이더니 스무 명이 되었다.

집을 나올 때 경비 아저씨 시선이 민망스러웠다고 다 한 마디씩 한다.

나도 그랬으니. 정신 나간 여자라고 말하기에 딱 좋은 나쁜 날씨 아닌가.

 

차는 빗속을 달리고, 세속이야기에 웃음꽃을 피우는 아줌마들 수다 소리가 왁자하다.

어떤 산우는 자기 남편이 "비 오는데 배낭은 놓고 그냥 나가지 그래" 했다면서 "아니! 마누라보다 배낭이 더 소중한가 봐" 해서 한바탕 웃었다.

 

비는 약하게 오락가락한다.

산행 코스 6시간 30분 동안 젖었다 말랐다 하며 일정을 마쳤다.

 

매주 하루 가사일 다 잊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연에 몸을 담그고 스트레스를 땀으로 다 녹이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노곤함도 잊고 삶 한 가닥씩 펼쳐 놓는 아줌마들.

남편 흉, 시어머니 흉, 며느리 흉,.... 흉이라기보다 소통 안 되고 코드가 맞지 않는 부분을 화두로 시작한다.

은근히 속내를 드러내며 투덜대고, 맞장구치고 긁어주고 위로하며 쓰고 단 인생의 맛에 공감하며 각자 지닌 색깔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며느리 같은 산우에게서 젊은 속내를 이해하는 폭을 넓히고, 시어머니 같은 산우에 충고를 듣고 지혜를 습득하며 본인의 성격을 되짚어 보기도 성찰하기도 한다.

종종 말실수와 가벼운 행동으로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할 때도 있으나, 인생 선후배가 각별하여 금세 분위기가 평정된다.

성격 나름이겠으나 나이가 들수록 미안하다는 말에 인색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면 고맙다는 말도 쉽게 하게 된다.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면 친정아버지가 먼저 생각난다.

언젠가부터 소소한 일에도 "미안하구나."라고 자주 말씀을 하시더니 몇 해 뒤 돌아가셨다.

몸의 변화에 마음이 약해지기도 하셨겠으나 나이가 들면서 자신을 비워내는 연습을 하신 것 같다.

 

나도 얼마 전부터 집을 나설 때는 장롱 정리를 하고, 청소며 빨래를 다 해치우고 나서는 습관이 생겼다.

생각이 몸보다 먼저 나이를 실감하고, 만약에...라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피곤하게 몸을 부린다.

 

산에 가는 날은 맑은 기氣뿐 아니라, 생각과 마음조차 정화하는 날이다.

한 주간 있었던 서로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미안해하고 상황에 대처하는 슬기를 배운다.

모서리가 조금씩 둥글어질 때마다 일상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다.

김종철 시인의 "고백성사"를 잠깐 생각한다

 

못을 뽑습니다

휘어진 못을 뽑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못이 뽑혀져 나간 자리는

여간 흉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성당에서

아내와 함께 고백성사를 하였습니다

못 자국이 유난히 많은 남편의 가슴을

아내는 못 본 체하였습니다

나는 더욱 부끄러웠습니다

아직도 뽑아내지 못한 못 하나가

정말 어쩔 수 없이 숨겨둔 못대가리 하나가

쏘옥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입니다

 

점점 작아지는 가슴으로 "미안하구나." 하시던 아버지.

나이가 들어서야 아버지 마음을 알게 된 부끄러움이 아직도 못대가리처럼 박혀있다.

 

 

 

2005년 8월 23일 흔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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