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에 먹히다 / 성영희
건물 화단에 종이컵 하나 버려져 있네요
몇 해쯤 묵었나 봐요, 몸의 반은 삐뚜름히 흙에 묻혀 있고요
어디서 날아온 풀씨인지 그 작은 몸을 빌려 터를 잡았네요
하트 모양의 잎들이 흙과 종이컵 사이의 단절을 넘어 사뿐사뿐 초록 불을 놓고 있어요
쉿, 가만히 들어봐요
조용조용 번져 허물을 덮는 저 여린 것들의 몸짓,
저렇게 번지고 또 번지면 세상이 온통 파랗게 물들어
초록 궁전이 생기지 않을까요
우리, 그 안에서 풀잎처럼 입 맞춰요
파랗게 파랗게 입 맞추다 파랗게 파랗게 배 부풀면
파아란 아기 낳고 파아랗게 웃어요
봄비를 먹고 깨어난 보리 싹처럼
작은 화단, 초록이 번져 나를 삼켜요
은애(恩愛)
성영희
일곱 번째 항암치료를 받고 북망산천을 돌아 집에 도착하신 아버지는 당신보다 먼저 가실 거라던 팔순 어머니의 밥상을 받고 수저를 든 채 아무 말도 잇지 못하셨다. 예측할 수 없는 삶 앞에서 밥 한 숟가락이 이토록 감개무량이라니! 젖은 밥상에 손님처럼 찾아 온 석양이 부푼 슬픔을 다독인다.
논에서 돌아오신 아버지가 등목을 하고 논바닥처럼 갈라진 발을 씻을 때까지 나는 수건을 들고 잠잠히 아버지의 마른 등과 힘줄 불거진 종아리와 발뒤꿈치를 살피며 참 가상한 꿈을 꾸었다. 이 담에 시집을 간다면 고아를 선택해 남편과 오로지 내 부모님만을 위하는 삶을 살리라. 그러나 사랑은 어릴 적 꿈 따윈 까맣게 잊게 하는 묘약이었다. 살림을 차리고 아기가 생기고 시댁을 섬기고 집을 옮기고 내 행복의 영역이 넓어질수록 아버지는 볏단처럼 가벼워지고 있었다.
기운을 차리신 아버지는 서둘러 텃밭의 총각무를 뽑고 파를 다듬어 어머니께 김치를 담그실 것을 재촉했다. 느이 아버지 하루 묵어 오시더니만 김치 담궈 보내라고 성화시구나, 총각무가 아주 연한 게 맛날 거시여, 아범 좋아하니 쉬기 전에 언능 냉장고에 넣거래이...
알곡 다 털어낸 마른 볏단, 서로 부등켜 안고 봄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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