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연필이 되고 싶다.
아무 곳에나 잘 써지고
굵고 진해 잘 보이는 매직이나 싸인펜보다
조금은 흐려도 연필이 되고 싶다.
누군가에겐 및그림이 되었다가
소리 없이 사라질지라도
난 그 밑그림이었음을 만족하고 싶다.
몇 번씩 토씨 고쳐 쓰던 일기처럼
오늘을 또 내일을
고쳐 쓰고 싶어서다.
한번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잊어야 할 것은 잊고
버리고 싶은 것은 버리며
살고싶다.
오래 간직하고 싶은 것은
조금 진하게 침 발라 쓰면 되고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것은 조금 꾹 눌러
뒷장에 박히도록 쓰면 되는
그런 연필이 되고 싶다.
가끔 우울한 날은 손등에 올려 빙그르르 돌리듯이
짧은 여행이라도 다니다기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연필이 되고 싶다.
너무 진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그런 자화상을 그리는
연필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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