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어느 봄날

나의 뜰/마음자리

by 김낙향 2008. 10. 13. 12:18

본문

어느 봄날 

 

 

 눈부신 오월, 여린 바람이 오락가락하는 저수지 둑 미루나무 밑에 앉았다. 

 봄이 자라고 있는 숲은 정갈하고 하늘도 고요하다.

 고물거리는 아지랑이 너머 어둑한 숲속에서 나방 한 마리 날갯짓한다. 풀잎에 내려앉을 듯 어정쩡하니 팔락이더니, 이 풀잎 저 풀잎에 망설임만 묻혀놓고 숲 속으로 사라진다. 나방의 외출은 잠깐이었으나 나는 혹여나 하고 숲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모퉁이 돌아 장에서 돌아오는 어머니 치맛자락 아른거림을 눈 빠지게 기다리듯이. 그리 앉아 있는 나를 구경하듯 오가던 참새들이 청미래 넝쿨 속에서 또 나를 훔쳐보며 쏟아내는 수다, 다 모으면 한 됫박이 넘칠 것 같은 청량 하면서도  뾰족한 음정이 낮고 높은 음률로 반복된다. 자세히 들으면 그 소리의 양과 무게는 시시때때로 다르다. 그래서 오래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저수지 둑에 쪼그려 앉아, 수면 위 은빛 침묵과 산 그림자를 품고 있는 무거운 침묵을 바라보다가 문득 "말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라는 격언이 떠오른다.

 침묵을 피천득 시인은 이렇게 썼다. 말의 준비 기간이요, 바보들의 체면을 유지하는 기간이라고,  "말주변이 없다"하는 말은 "나는 무식한 사람이다"라고 했으며, 화제의 빈곤은 지식의 빈곤, 경험의 빈곤, 감정의 빈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다.

"금강석 같은 말은 있어도 찬란한 침묵은 없다"라고.

 

 시선이 멈추는 곳에서 어디선가 읽었던 글이 떠오르면 밋밋하던 마음에 소소히 싹트는 촉촉한 감정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고요해진다.

 인간에게는 없는 찬란한 침묵, 햇살에 반사되는 은빛 물결을 나는 찬란한 침묵이라 했다.

 정해진 격식 없는 오늘도 나태해진 나의 노트에 하루치 흔적의 글이 된다. 그래서 계속 마음이 가는 쪽으로 골몰해지려 한다. 

새순 키우는 봄날처럼 어쩌다 순간순간 철드는 내 안에 내가 매일 나보다 먼저와 기다리는 오늘을 서운하지 않게 보내려고.

 

 

2006. 5. 27일 

'나의 뜰 > 마음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강나무 꽃망울처럼  (0) 2008.10.13
소쇄원에 드니  (0) 2008.10.13
시인의 수필집을 읽다가  (0) 2008.10.13
홀로여도 좋다(2)  (0) 2008.10.13
홀로여도 좋다 (1)  (0) 2008.10.13

관련글 더보기